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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얼굴 없는 산타들 “나의 기부를 알리지 말라”

등록 2015-12-24 19:21수정 2015-12-24 20:28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함에 시민들이 기부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함에 시민들이 기부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올해도 어김없이…전국 곳곳 남몰래 기부행렬

“어렵고 소외된 곳에 써달라”
연탄 현금 쌀 바나나…
선물 종류도 각양각색
“신분 노출되면 기부 안할래”
협박 아닌 협박까지
연말이면 사랑의 선물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이들이 어쩌면 산타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선행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얼굴 없는 천사들이 세밑 덜 가져 외로운 이들을 보듬고 있다.

24일 새벽 전북 완주군 용진읍사무소 민원실 앞에 누가 20㎏짜리 쌀 30포대를 두고 사라졌다. 쌀 포대 위엔 “매년 연이어 작은 거지만 저에 마음 놓고 갑니다. 관내 손길 못 미치는 어려운 가정에 <특히 먹고 사는 어려움>적은 되었음 합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만 남았다. 군데군데 틀린 맞춤법이 더 정겹다. 천사는 8년 전인 2008년부터 해마다 이맘때 읍사무소 앞에 쌀을 두고 사라진다.

전현숙 용진읍장은 “이번엔 인사라도 하려고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까지 살폈지만 너무 짙은 안개 때문에 얼굴 확인을 못 했다. 편지의 필체·맞춤법 등을 보면 어르신 같은데 좀체 감을 잡지 못하겠다. 진짜 천사 아니면 산타인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해마다 연말연시에 1억원이 넘는 돈을 기부하는 ‘대구 키다리 아저씨’가 올해도 어김없이 1억2000만원을 들고 찾아왔다. 지난 23일 오후 4시쯤 대구시 동구 신천동의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부근 식당으로 잠깐 나와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모금회 직원이 뛰어나갔더니 식사 중인 60대 남성이 “정부 손길이 미치지 않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혜택이 돌아갔으면 한다”며 1억2000만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를 건네줬다.

이 남성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5억9600만원을 기부했고 기부 때마다 신원을 밝히지 않고 사라졌다. 박용훈 대구공동모금회 사무처장은 “대구 키다리 아저씨가 소외된 이웃의 꿈과 희망이 되고 있다”고 했다.

대구 키다리 아저씨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천사들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난 23일 오전 10시께 부산 동구 초량6동 주민센터에 10㎏짜리 쌀 100포대가 배달됐다. 쌀 포대와 함께 배달된 쪽지에는 “어려운 학생들을 우선으로 사용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해 같은 날에도 100포대가 왔다. 주민센터 쪽이 쌀 배달 직원한테 기부자를 물었지만, 배달 직원은 “지난해와 올해 한 남성이 같은 주문을 했다. 신분이 노출되면 쌀을 사지 않겠다고 해 주문한 사람의 이름도 모른다”고 답했다.

지난 21일 오후 3시께 한 여성이 충북 제천시청에 연탄 2만장(900만원어치) 보관증을 주고 사라졌다. 이 천사는 2004년부터 12년째 연탄을 건네고 있다.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제천시가 신원 파악에 나섰다가 “신분이 노출되면 기탁을 하지 않겠다”는 이 여성의 반응에 얼굴 찾기를 멈췄다.

지난 23일 경기도 수원 경기공동모금회를 70대 부부가 조용히 찾아왔다. 끝내 누군지 밝히지 않은 이들은 외투 속 주머니에서 하얀색 봉투 꺼내놓고 사라졌다. 봉투에는 1년 동안 모아온 현금 100만원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5년째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똑같은 방식으로 기부를 하고 있다.

지난 21일 한 시민이 경기 의정부시청에 13㎏짜리 바나나 100상자, 지난 22일 충북 청주 용정동 충북연탄창고에 누군가 연탄 5000장을 쌓아 두는 등 얼굴 없는 천사들의 선행이 전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홍지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외협력본부 담당은 “연말이면 유독 기부·선행이 많고, 특히 외부에 자랑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작은 손길이 큰 사랑이 되기도 한다. 경기 수원시 공무원들은 구내식당의 남은 음식을 직원들에게 판매한 수익 300만원을 어려운 이웃 6명에게 전달했고, 충북 단양 어상천면 부녀회 허운기(59) 회장 등 17명은 1년 동안 하루에 100원씩 저금한 62만원으로 홀몸노인 15명에게 이불을 선물하기도 했다.

서관모 충북대 교수(사회학과)는 “요즘 많이 가진 이들보다 성실하게 벌어 적게 가진 서민들의 기부가 눈에 띈다. 한국적 기부문화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 복지 사각지대 등을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구대선 김기성 김영동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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