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픽션콘퍼런스에 참가한 활동가와 전문가 등이 상상한 2024년 혁신파크의 모습. 벌집 모양의 육각형에 참가자들은 텃밭, 재생에너지, 놀이기구 등을 그려 넣었다. 사진·지도 서울혁신센터 제공
“여기 일단 들어오면 살아 나가는 동물이 없어야 하는 게 원칙이었어. 그러니까 동물들의 사형장이지.”
김기평(71)씨는 지난 12월23일 동물실험실이었던 11동 건물에 들어서자 여러 감정이 밀려오는 듯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김씨는 1968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국립보건원에 입사했다. 3만평(9만9173㎡) 거대한 터에 동물실험실이 들어선 건 1980년이다.
청주 오송으로 질본 이전하면서
용도잃은 은평구 녹번동 3만평에
박원순 서울시장, 혁신파크 조성
“사회병리 고민·해결 공간 만들자”
173개 단체 833명 입주해 활동
“관의 지원·운영방식 비혁신적”
자체협업 로켓난로로 난방 해결도
자치위 꾸려 시민참여 통한 혁신꿈
“1960~70년대만 해도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지. 항원, 항체를 형성하기 위해 동물의 피가 필요했는데, 내가 전채혈 기술(전체 피를 뽑는 기술)을 갖고 있었거든. 대학 나온 연구원들도 그걸 제대로 못했어. 손을 덜덜 떨더라고. 1980년대엔 동물실험을 참 많이 했어. 한번 실험에 토끼 수백 마리는 썼던 것 같아.”
입주단체 9곳이 모인 적정기술협의체는 로켓매스히터를 설치해 낡은 건물의 난방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지난 12월23일 함승호 적정기술공방 대표(오른쪽)와 정의웅 연구원이 1동 미래청 3층에 설치한 로켓매스히터를 가동하고 있다. 사진·지도 서울혁신센터 제공
외관은 그대로다. 하지만 기운은 다르다. ‘그’ 동물실험실에서 이젠 전시, 공연, 세미나가 진행된다. 최근 동물실험에 영감 받은 예술가들이 생명에 관한 전시회도 열었다. 토끼, 모르모트 등 동물별로 나눠진 기존 실험실을 작가들이 하나씩 맡아 설치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김씨는 “칠순이 넘으니 그때 희생된 동물들이 되돌아봐진다”고 했지만, 공간은 ‘내다볼’ 게 더 많다는 양 생기가 넘친다. ‘서울혁신파크’의 현재다.
국립보건원은 2004년 질병관리본부로 확대 개편됐고 2010년 충북 청주 오송보건의료행정타운으로 이전하면서 녹번동 터는 텅 비게 되었다. 2010년 퇴직한 김씨는 1981년부터 인근에 거주한 덕분에 이 땅에 대한 지역주민의 개발 열망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긴 은평구의 요지 중 요지거든. 민간업체가 부지를 사서 상가와 아파트를 지었으면 어마어마했을 거야. 사실 주민들 사이에선 (혁신센터 방안에 대해) 말이 좀 많았어.”
지난 12월23일 김기평(왼쪽)씨가 안근철 서울혁신센터 매니저에게 국립보건원(현 질병관리본부) 시절, 전국의 보건소 직원들이 기숙하며 교육을 받았던 훈련소 건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지도 서울혁신센터 제공
2011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서울의 난제를 푸는 새 방법론으로 사회혁신을 기조 삼았다. 2013년 5월 이곳을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혁신파크인 ‘서울혁신파크’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의 질병을 연구하고 치유하던 공간을 사회적 병리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결정이었다.
같은 산업의 기업·기관들이 한데 모여 시너지 효과를 도모하는 산업단지(클러스터)처럼 사회혁신파크는 사회혁신 관련 기관·단체·기업 등을 집적한 단지다. 스페인 빌바오의 바스크혁신센터 데노킨(Denokinn),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세계의 도시를 옮겨다니는 이동식 연구소인 베엠베(BMW) 구겐하임 랩, 대만의 화산1914창의문화원구 등이 운영되고 있지만, 서울혁신파크처럼 32채의 건물로 이뤄진 대규모 단지는 유례가 없다.
김우영 은평구청장은 “(북한산) 독바위에서 여기 전경이 다 보인다. 2년 전 함께 거길 올랐던 박 시장이 내 손을 잡더니 ‘5년 안에 서울혁신파크가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라고 했다. 여기에 큰 빌딩을 짓지 않았다고 실패라고 주장하시는 주민도 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행보는 그동안 남들이 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중간 과정은 실패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는 2012년부터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인생이모작지원센터, 청년허브 등 4개의 중간지원기관을 입주시켰고, 지난 4월 서울혁신파크를 총괄 기획·관리할 서울혁신센터를 세웠다.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혁신·재생·라이프스타일·생태 분야에 컨설팅·노무·회계·법무 등 지원조직까지 망라해 입주시켰다. 현재 미래청에 자리잡은 단체 중 비영리 조직이 60%,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영리 조직이 40%다. 청년청 입주단체,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의 마을기업, 인생이모작지원센터의 시니어단체,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 입주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까지 합치면 173개 단체 833명이 서울혁신파크에서 생활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초반기다. 입주가 시작된 지 반년이 지났으나 혁신가들 불만부터 나온다. 한 입주단체 대표는 “희망에 부풀어 입주했는데 5개월 생활 만에 실망했다. 입주단체들은 어떻게 성과를 만들어낼까 절박한데, 혁신가를 지원하는 관의 방식, 운영체계는 전혀 혁신적이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절차, 실적 등을 우선시하는 관료 생태계와의 충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단 얘기다.
당장 겨울이 닥친 서울혁신파크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우습게도 난방이었다. 대부분 수십년 된 시설인데다 이전 뒤 재사용에 대한 대비가 없어 중앙난방이 힘든 건물이 많았다. 하지만 열악한 인프라가 오히려 ‘자치와 혁신’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3층 넓은 강당에 설치된 커다란 난로가 작은 상징이다. 9개의 입주단체가 모인 적정기술협의체가 설치한 ‘로켓매스히터’다.
보일러의 온수탱크를 재활용해 일반 가정용의 두 배 크기로 설치한 로켓매스히터 옆으로 축열체가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따뜻한 온돌 아랫목처럼 입주자들이 앉거나 누워 쉴 수 있게 만들었다.
함승호(53) 적정기술공방 대표는 “경제성 높은 난방 시스템으로 주목하고 있었는데, 마침 서울혁신파크의 난방과 단열 상태가 심각해 다른 적정기술 단체들과 함께 도시형 난방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두고 소규모와 단순성,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적정기술은 첨단기술과 달리 전통지식을 활용하거나 약간의 기술 전수만 받으면 적용이 가능하다.
도시 과제인 환경·공유가치와 실용성을 접목하기 위한 소소한 혁신인 셈이다. 혁신가들이 집적된 덕분에 가능했다고 이들은 본다. “적정기술협의체를 구성하고 있는 교육단체와 방과후 수업, 예술단체와 아트 쪽, 마을기업과 공공시장을 논의하면서 개별 단체가 미처 생각 못했던 적정기술의 확산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이게 서울혁신파크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함 대표)
이처럼 90여개 입주단체끼리 자발적으로 협업해 일정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작당시작’이 지난 9월부터 시작됐다. 도시형 로켓매스히터 외에도 ‘시설 노동자의 가슴뛰는 회사 만들기’(노무법인 의연), ‘삶의 기술을 잇는 진로’(창의공작소), ‘에코 디자인 네트워크’(언더독스크루) 등 20여개의 프로젝트가 뽑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12월에는 입주단체들이 서울혁신파크 자치위원회를 만들었다. 파크살이의 자잘한 문제점을 공유하고 다양한 혁신활동이 가능하도록 서울혁신파크만의 문화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서울혁신센터는 자치위원회와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서울혁신파크와 지역사회를 갈랐던 수십년짜리 담장부터 허물었다. 나무를 심고 시민에게 쉼터로 개방했다. 내부에서 외부로 길을 튼 격이다.
정상훈 서울혁신센터장은 “박원순 시장 취임 뒤 시민 참여를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정책을 계속 만들어왔지만 아직 시스템화되지 않은 면도 있고 시민의 이해도 부족한 게 사실이다. 서울혁신파크에서 다양한 사회혁신 사례를 하나의 강력한 의제로 모으고, 시민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공언한 세계 명소가 되기까지 3년여가 남았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