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 관장. 사진 정대하 기자
[짬] ‘더불어락노인복지관’ 임기 마친 강위원 관장
“마을 어르신 한분은 도서관과 같다”
자치회 꾸려 북카페 등 협동실험
“수혜자에서 주체로” 주민역량 ‘확인’ 1997년 한총련 의장 등 두번 옥살이뒤
고향 영광서 ‘여민동락’ 노인복지 시작
“농촌공동체 새로운 10년 준비할 계획” “강 관장님은 사람을 배려해요. 그라고 우덜이 서로를 존중하게끔 맨들지라….” “복지관 간판도 ‘더불어’로 안 바꿔부렀소? 공동체로 살자는 것이라요.” 우리춤 강습에 맞춰 도착한 7~8명의 어르신들은 ‘회원들 사이가 좋아졌다. 전에는 서로 다툼도 많았는데 갈등이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강 관장은 5년 전 위탁에서 공립운영으로 바뀐 노인복지관을 맡아 이름을 ‘더불어락~’으로 내걸었다. 목영옥(68)씨는 “노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공손하고, 사람이 겸손하다. 연설도 미치도록 잘한다.(웃음) 떠난다니 서운하고 아쉽다”고 했다. “직원들과 어르신들이 식구와 이웃을 넘어 동지로 함께해 왔기에 서로에게 이별이 낯섭니다.” 강 관장도 “아직 짐 정리조차 못 하고 있다. 시집가는 기분이랄까. 신명난 굿을 한판 벌이고 난 뒤의 묘한 여운이 남는 그런 심정”이라고 했다. 그는 취임 이후 “어르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서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첫 작품은 2011년 12월 복지관 1층에 선보인 ‘더불어락 북카페’(125㎡)였다. 어르신 400여명이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으고, 과거 젊은 시절 경험을 살려 직접 건축·설비·전기 공사에 나섰다. 북카페 앞엔 “협동으로 피어난 꽃”이라는 목판이 붙어 있다. 할머니 바리스타도 등장했다. 어르신 20여명은 이런 경험에 자신감을 얻어 협동조합형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인근 시장에서 ‘밥상마실’(팥죽 가게)과 ‘두부마을’을 열었다. 복지관에선 어르신들이 만든 두부를 날마다 판다. 이들은 월 20만원 급여에서 5천원씩을 저 멀리 팔레스타인 분쟁지역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직접 써 <멋스런 황혼이고픈 여인> <꿈을 향한 도전> 등의 제목으로 자서전을 냈다. 강 관장은 “사진 촬영과 편집 디자인에 들어갈 글씨까지 스스로 쓰셨다”고 소개했다. 강 관장은 “복지 수혜자로만 머물던 어르신들이 스스로 이웃을 돌보는 복지 주체로 달라졌다는 점이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복지관은 하루 이용객만 600명이 넘는다. 그의 취임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자치회를 구성했다. 3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자치회는 복지관 운영뿐 아니라 행사, 프로그램 강사 채용까지 결정한다. 해마다 두 차례 마을축제 형식의 대동회를 열어 각종 ‘이야기꺼리’(의제)를 제안하고 발표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새로운 복지 실험으로 복지관은 전국 지자체, 복지기관, 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줄지어 찾는 “복지 순례지”가 됐다. 지금까지 약 160회 3400여명이 다녀갔다. 강 관장은 “어르신들과 주민들이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는 자치 역량을 이미 다 갖고 계셨다. 그 열망과 힘을 키워내는 데 기여하는 게 복지의 본령이라는 철학과 소신을 광산구에서 펼칠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다시 가난과 고난의 더 깊은 현장으로 들어가야지요.” 그는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노모(91)를 뵌 뒤 지리산에서 며칠 동안 쉴 생각이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 역정 때문에 노모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 전남대 국문과 재학 중이던 그는 97년 8월 한총련 의장으로 구속된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년 2개월 형을 살았다. 두번째 수감생활이었다. 그는 89년 고교 3학년 때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들의 해직 반대를 주장하던 ‘광주지역 고등학생 대표자 협의회’ 초대 의장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제적됐다. 출소 이후 서울에서 4년 동안 식당 종업원, 청소·배달원, 옷가게 점원 등으로 일했다.전남대 국문과 재학 중이던 그는 97년 8월 한총련 의장으로 구속된 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년 2개월 형을 살았다. 옥중에서 “현장 실천운동은 사회복지로 한다”고 결심한 그는 대구의 한 복지관에서 일하면서 한국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고향인 전남 영광군 묘량면으로 돌아와 2008년 7월 학생운동 동지들과 처음으로 어르신 돌봄 시설인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열고 농촌마을 복지활동을 시작했다. 여민동락은 유기농 농장 경영, 모싯잎 송편 생산, 이동 5일장 운영 등으로 자립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이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강 관장은 최근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강력한 입당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민주당 쪽 인사는 “당 지도부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복지공동체를 성공시킨 그를 ‘새로운 진보의 모델’로 보고 영입을 추진했지만, 본인이 고사해 무산됐다”고 했다. 그는 “아이고, 아닙니다”라며 웃기만 했다. 강 관장은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일을 계속하면서 영광 여민동락 공동체의 새로운 10년을 준비할 생각이다. 또 올해엔 그동안의 마을공동체 복지운동 경험을 기록한 책을 낼 생각이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분출하고 있는 광주공동체의 새로운 미래와 관련한 사회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공동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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