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사실 관계에 대한 명확한 확인 없이 사건 피해자를 ‘내연녀’로 표현해 언론에게 브리핑한 경찰서장을 징계하라고 권고했다.
지난해 9월,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위아무개(57)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여성 ㄱ씨의 아들(9)을 인질로 붙잡은 채 “ㄱ씨를 불러달라”며 2시간 남짓 경찰과 대치했다. 경찰은 위씨를 체포한지 1시간 만에 언론을 상대로 사건 경위와 범행 동기 등에 대한 브리핑을 했고, 일부 방송은 이를 생중계하기도 했다. 최아무개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브리핑에서 위씨가 작성한 쪽지와 문자메시지를 바탕으로 “위씨는 ㄱ씨에게 현금을 빌려주는 등 결혼을 전제로 만나서 사귀는 사이”, “연정을 품고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중 피해자가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자기를 거부하는 것에 화가 나서 불시에 벌인 인질극” 등이라는 표현을 쓰는 등 두 사람을 ‘내연관계’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경찰 브리핑 내용을 뒤늦게 알게 된 ㄱ씨는 내연관계라는 브리핑 내용이 사실과는 다르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 조사 과정에선, 경찰이 브리핑 전에 ㄱ씨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최 전 서장은 “브리핑 시점까지 ㄱ씨와 연락이 닿지 않아 ㄱ씨의 주장을 파악할 수 없었고, 언론에서 동기를 계속 물어 사유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브리핑 자료를 만드는 데 2시간이 걸린다”는 실무자의 말을 묵살하고 “1시간 이내로 (자료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드러났다.
인권위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관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사실로 단정해 브리핑해, 피해자의 명예·감정을 훼손하고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 만큼 엄중한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며 “경찰청장은 경찰서장에 대해 징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처로 수사·공보업무 관련자에 대한 인권교육을 실시하라”고 권고했다.
한편, ㄱ씨는 경찰에 의해 잘못 공표된 사실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해당 내용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신청하는 수고로움도 겪어야 했다. 인권위는 “일부 언론사는 조정신청을 통해 정정보도문을 보도했고, 다수 언론사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삭제하거나 피해자의 반론이 담긴 기사를 게시했다”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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