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안산 단원고 박성호 학생의 누나 박보나(왼쪽)씨와 남지현 학생의 언니 남서현씨가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 세월호 농성장에서 세월호 생존 학생과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보며 얘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세월호와 사람들
희생자 형제자매들의 2년
희생자 형제자매들의 2년
가족을 잃은 슬픔에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엄마처럼 기저귀도 갈아주고, 목욕도 시켜준 동생이었다. 2년 뒤 성인이 되면 술도 한잔 마시자고 한 친구 같은 동생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단원고 학부모들에 비해, 형제와 자매를 잃은 이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진상 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부모들의 빈자리를 메우면서도, 학교·직장을 다니고 또래 친구를 만나야 했던 희생자 형제자매의 2년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동생 남지현양을 잃은 언니 남서현(24)씨와 박성호군을 잃은 박보나(22)씨를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만났다. 이들이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것이다. “부모님 힘드니까 너희들이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남씨는 “저한테 ‘너는 괜찮니?’라고 묻는 게 아니라 ‘엄마 괜찮니’라고 물었다”고 했다. 박씨도 “사람들이 우리는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엄마한테 못 물어보는 것, 동생 주검 상태가 어땠냐 같은 것들을 물어보더라”고 했다. 성호군이 어렸을 때는 목욕까지 시켜준 ‘엄마 같은’ 누나였기에 그런 질문은 가시처럼 박혔다.
부모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위해 거리로 나섰지만, 집은 오롯이 형제자매들의 몫이 됐다. 아직도 동생 생각에 울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는 남씨는 100일 동안은 아예 집 밖에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집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박씨는 “엄마가 볼까봐 그냥 자면서 울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떠난 동생과 자신을 견주는 것도 상처를 덧나게 했다. 박씨는 “밥을 잘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엄마가 ‘성호는 밥을 잘 먹었는데’라고 하시니 더 아팠다”고 말했다. 형제자매들의 심리상담을 했던 정혜신 박사는 “일부 동생들의 경우엔 먼저 간 언니 오빠의 취향이나 성향을 닮아가려는 모습도 보인다”며 “부모에 대한 관심을 바라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봤다.
고 남지현양 언니 서현씨
고 박성호군 누나 보나씨
“사람들은 우린 덜 힘들거라 생각”
“엄마가 볼까봐 그냥 자면서 울어”
주변서 보상금 등 물을때도 상처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또래 대학생 초청해 행사 열고
생존학생들과 책 출간 등 활동
“이만큼 아팠다 말하는 게 아닌
세월호로 세상과 말하고 싶어” 피해자에 대해 ‘떼를 쓴다’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다’는 악성 여론이 형성됐을 때도 형제자매들은 학교나 직장을 다녀야 했다. 남씨는 “동생 장례가 끝난 뒤에 정말 오랜만에 학교를 갔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헐. 쩔어, 나 소름 돋았어’라고 말하더라”며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가십으로 느끼는 거 같아서 모든 친구와 관계를 끊고 그때부터 밖에 안 나갔다”고 말했다. 박씨도 “내가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아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피해자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 했다. 보나씨의 동생이자 성호군의 작은누나인 예나(21)씨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얼마 받았느냐’ ‘나는 세월호에 관심 없으니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 큰 상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이 상처에 ‘내성’이 생겼다고 했다. 한편으론 더 나서야겠다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부모님들이 삭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도보행진하는 것을 ‘따라다녔던’ 이들은 지난해 4월5일 처음 형제자매들의 입장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엔 형자자매들이 주축이 되어 대학생들을 안산으로 초청해 ‘4·16 대학생 새로배움터’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총선을 앞두고는 살아 있었다면 첫 투표를 했을 동생들을 대신해 주위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박씨는 ‘당신이 쉽게 포기한 투표권은 아이들이 그렇게 바랐을 투표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글이 담긴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놓기도 했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는 생존학생들 이야기와 함께 <다시 봄이 올 거예요>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남씨는 “이만큼 아팠다, 상처 받았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를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같은 세대인 청년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고 박성호군 누나 보나씨
“사람들은 우린 덜 힘들거라 생각”
“엄마가 볼까봐 그냥 자면서 울어”
주변서 보상금 등 물을때도 상처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또래 대학생 초청해 행사 열고
생존학생들과 책 출간 등 활동
“이만큼 아팠다 말하는 게 아닌
세월호로 세상과 말하고 싶어” 피해자에 대해 ‘떼를 쓴다’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한다’는 악성 여론이 형성됐을 때도 형제자매들은 학교나 직장을 다녀야 했다. 남씨는 “동생 장례가 끝난 뒤에 정말 오랜만에 학교를 갔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헐. 쩔어, 나 소름 돋았어’라고 말하더라”며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가십으로 느끼는 거 같아서 모든 친구와 관계를 끊고 그때부터 밖에 안 나갔다”고 말했다. 박씨도 “내가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을 아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피해자의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시더라”고 했다. 보나씨의 동생이자 성호군의 작은누나인 예나(21)씨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보상을 얼마 받았느냐’ ‘나는 세월호에 관심 없으니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 큰 상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이 상처에 ‘내성’이 생겼다고 했다. 한편으론 더 나서야겠다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부모님들이 삭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을 알리기 위해 도보행진하는 것을 ‘따라다녔던’ 이들은 지난해 4월5일 처음 형제자매들의 입장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엔 형자자매들이 주축이 되어 대학생들을 안산으로 초청해 ‘4·16 대학생 새로배움터’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총선을 앞두고는 살아 있었다면 첫 투표를 했을 동생들을 대신해 주위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박씨는 ‘당신이 쉽게 포기한 투표권은 아이들이 그렇게 바랐을 투표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글이 담긴 사진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놓기도 했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는 생존학생들 이야기와 함께 <다시 봄이 올 거예요>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남씨는 “이만큼 아팠다, 상처 받았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를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같은 세대인 청년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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