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교사 안용수씨
80년 해직교사 안용수씨
‘사표 전 해임 제청’ 교육청에 새 증거
‘사표 전 해임 제청’ 교육청에 새 증거
“교장이던 아버지도 형 때문에 빨갱이로 몰려서 강제 해직당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원통해서 눈을 못 감겠다. 이 억울함을 풀고서 너라도 꼭 공직 생활을 다시 하라’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단 하루라도 교단에 서서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2001년 9월 작고한 선친의 유언을 되읊는 안용수(64·사진)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그는 ‘베트남전 국군 포로 1호’ 안학수씨의 동생이다. 형 학수씨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월북한 것으로 정부에 의해 왜곡됐으나, 동생 용수씨의 끈질긴 진상규명 노력으로 2009년 납북됐다는 사실을 정부에서 인정받았다.
형의 명예회복에도 불구하고 안씨의 삶에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흔이 있다. 1974년 서울교대를 나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그는 80년 신군부의 ‘사회정화계획’에 따라 공무원, 교사, 공공기관 임직원 등 공직자 8천명이 쫓겨날 때 ‘월북자 형을 둔 사상 불순자’라는 이유로 해직당했다. 그가 학원선교회라는 교사 모임을 만들어 ‘촌지 안 받고 상납 안 하기’ ‘편애 없애기’ 등을 실천한 것도 해직 사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만 해도 한 반에 학생이 70~80명씩으로 많았고, 학부모들의 촌지 봉투도 상당했어요. 월급 8만원에, 촌지가 30만원이나 됐으니까요. 대다수 교사들이 일부를 교장에게 상납했는데, 그런 관행을 없애려고 노력했지요.” 지금의 국가정보원 구실을 했던 보안사에서 파견된 직원에 의해 구타를 당하는 등 당국의 압력에 시달리던 안씨는 2년 만에 학원선교회를 해체했다.
89년 특별법 제정으로 해직 공직자들이 복직하거나 보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등으로 사회생활이 어려웠던 안씨는 특별법의 존재조차 몰라 구제 신청 시기를 놓쳤다. “2009년 납북자로 인정되기 전까지는 월북한 형을 둔 채 교사 복직될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못했거든요.”
하지만 복직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고 있다. 2012년 서울시교육청에 복직을 신청하고, ‘80년 자발적으로 사직한 게 아니다’라는 소송을 냈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올 1월에야 해직당할 때 근무했던 금북초의 교감을 찾아내 ‘교사가 사직원을 제출하기 전에 해임 제청서를 교육청에 보냈다’, ‘안 교사가 사직원을 제출한 것은 보안사 전화를 받은 뒤였다’는 진술서를 받아냈다. 최근 오영중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등 변호사 15명은 “사직원 제출이 무효임을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가 나온 점 등에 비춰 추가 쟁송(소송 등 법적 절차) 없이도 교육청이 복직 처리를 할 수 있다”는 의견서를 시교육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시교육청 관계자는 “새로운 증거가 나온 만큼 복직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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