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실 적에 그토록 일본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 애달파하신 양반이 사과도 못 받고 어찌 편케 눈을 감겄소. 남겨둔 나도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공점엽 할머니의 발인을 몇 시간 앞둔 19일 새벽 전남 해남군의 한 장례식장에서 공 할머니의 아들 박정복(64)씨가 자신이 지켜본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일본에 다녀오고 나서 스무 살 많은 아부지를 만나 나를 낳으셨제. 아들이 귀헌 집안이라 그리 공을 들여 나를 낳았는데 나 세 살 때 아부지가 돌아가셔서, 어린애 하나 델꼬 울 어머니가 참 안 해 본 일 없이 고생을 혔소.”
어머니는 남의 집 셋방 살며 날품 팔아 받아온 쌀로 자식을 키웠다. 목숨 걸고 돌아온 고국에서도 고생은 끝이 없었다. 행상을 하면서도 그 가난한 살림에 꿀에 달걀노른자를 섞어 아들 입에 넣어준 어머니. 아침이면 몸을 깨끗이 하고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이웃과 아들의 복을 빌었다. 아들이 할아버지가 되었어도 박정복씨가 집을 나서면 돌아올 때까지 할머니는 대문 밖에서 하릴없이 호미질을 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가난한 중에도 길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줍지 않았던 어머니의 정직과 꼿꼿함을 아들은 기억했다. 그 기억들이 자신을 키웠다며 아들은 어머니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돈 많이 버는 직업 소개해준다는 말에 속아 열여섯이던 1935년 일본에 넘어간 할머니는 8년간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다. 지난 3년간 할머니를 찾아뵙고 정을 나눠온 ‘공점엽 할머니와 함께하는 해남 나비’의 이명숙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지역사회에서 처음 시작하던 때만 해도 “남우세스럽게 그런 일을 왜 꺼내느냐?”는 몇몇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런 염려를 박씨는 한마디로 그치게 했다 “우리 어머닌데 뭐가 어떻습니까?”
2002년 공점엽 할머니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던 때에도 박정복씨는 “당당해야 한다”고 어머니에게 힘주어 말했다. 아픔을 숨기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아들은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입관하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못한 공점엽 할머니의 두 눈을 쓸어내리며 아들은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좋은 디로 먼저 가셔서 잘 지내고 계시오. 인자 나도 나이 먹었응께 곧 같이 만납시다.”
사랑하는 이들이 곱게 준비한 꽃상여 위에 올라 공점엽 할머니는 해남 너른 들판에 묻혀 영면에 들었다. 봉긋 솟은 봉분 주위로 부는 바람에 청보리가 일렁인다. 공점엽 할머니, 마음의 해원 바람에 날려보내시고 이들의 사랑 속에 부디 평안히 쉬소서.
해남/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우리 어머닌데 뭐가 어떻습니까?”
“부디 좋은 데로…”
일본 사과는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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