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하타 제철소 안내판에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노동했다’는 기록 한 줄 남기는 것이 소원입니다.”
재일동포 2세 배동록(73)씨는 9일,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야하타 제철소가 “일제 강제징용의 대표적인 역사현장”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배씨는 일제강점기에 부모가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의 야하타 제철소에 강제징용되는 바람에 일본에서 태어나 70년 이상 살고 있다.
그는 우리겨레하나되기 울산운동본부 초청으로 일제 강제징용과 재일동포들의 삶을 알리기 위해 울산을 방문해 이날 강연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했다.
그는 일본 규슈지역을 중심으로 양심있는 일본인 민간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현장을 찾아다니며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일본에 끌려왔고 일본에서 어떤 차별과 멸시, 고통 등을 겪으며 살았는지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매주 기타큐슈시의 초·중·고교를 돌아다니며 일본 청소년들에게도 강연을 해왔다. 2004년 어머니가 만 93살에 세상을 뜬 뒤엔 누나와 딸 등과 함께 강연을 해 올해 2월19일로 1000회 강연 기록을 세웠다. 20년 동안 1년에 50회씩 강연한 꼴이니 거의 한 주도 쉬지 않은 셈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보다 10년 앞선 1986년부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가 생전에 ‘일본 땅 한구석에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손톱자국, 발톱자국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군함도와 야하타 제철소 등 일제 강제징용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이 됐는데도 안내판에 강제징용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일본 학생들에겐 이웃나라 역사를 올바르게 배워 서로 불행했던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강연을 한다. 일본과 한국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편견을 갖거나 차별하지 말 것과 이웃나라 사람들로서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하자는 데 역점을 둔다”고 말했다.
배씨의 아버지는 1940년 경남 합천에서 농사를 짓다 일제에 의해 야하타 제철소로 강제징용됐다. 어머니도 2년 뒤 아이 넷을 데리고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듬해인 1943년 배씨를 낳았다. 일제는 2차대전 전황이 어려워지자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그의 어머니까지 아버지가 일하던 야하타 제철소로 강제동원해 하루 10~12시간 철광석을 나르는 중노동을 시켰다.
배씨는 “일본은 ‘모집’이라고 하지만 명백한 강제징용이고 동원이었다. 제철소는 물론 인근 탄광지역에도 수만명의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돼 끌려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매질에다 차별에 멸시까지 당해가며 노예처럼 일했다. 당시 제철소나 탄광의 강제노역 현장은 지옥과도 같았다고 한다”고 말하며 몸서리를 쳤다.
이미 작고한 부모로부터 형제자매, 자녀(1남2녀, 일본 거주), 손자에 이르기까지 4대가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 우리 말글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일본 패망 뒤 부모 모두 해방된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부산으로 가는 뱃삯을 마련하지 못해 눌러앉게 되었다. 해방된 조국의 남북 어디도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던 동포 귀환 문제엔 무관심했다. 이후 일본에 살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총련계 조선학교에 다녔던 일 때문에 1990년대 초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한국 땅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왔다 해방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남게 된 사람들을 마치 일본에 돈 벌러 온 사람처럼 취급하는 시선이 무엇보다 싫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2007년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사죄하는 뜻으로 벌인 국제반전평화순례 ‘스톤워크 인 코리아 2007’ 행사 때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의 민간단체 회원들과 함께 ‘사죄와 우호, 평화를 위하여’라고 새긴 1t 무게의 비석을 수레에 싣고 끌며 부산에서 임진각까지 종주하기도 했다.
울산/글·사진 신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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