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노동실상 고발한 수기보고
일본 작곡가 하야시 ‘노래’ 지어
일한연대 진보운동 무대에서 보급
최근 38년 만에 방한 가수 이노우에
우연히 만나 유씨에게 악보집 전달
“고문 땜에 은둔해 몰랐는데…” 감회
일본 작곡가 하야시 ‘노래’ 지어
일한연대 진보운동 무대에서 보급
최근 38년 만에 방한 가수 이노우에
우연히 만나 유씨에게 악보집 전달
“고문 땜에 은둔해 몰랐는데…” 감회
‘어느 돌멩이의 외침’ 저자 유동우씨
1970년대 전태일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과 더불어 유신개발독재의 노동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해 80년대 널리 읽힌 필독서가 있었다. 공원 출신 노동운동가 유동우(67·앞 가운데)씨의 자전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다.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열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3돌과 유엔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6월26일) 기념행사에서 저자 유씨는 우연히 만난 일본인 음악가 이노우에 시게루(67·뒷줄 왼쪽 셋째)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78년 출간 직후 일본의 유명 작곡가 하야시 히카루가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소재로 만든 민중가요 ‘돌멩이의 노래’ 악보집(일본음악협의회·일음협)과 음원이었다.
“내 책이 일본에 알려진 줄도 몰랐는데 노래까지 불리고 있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죠. 마치 고문으로 잃어버렸던 내 삶을 되찾은 것 같아요.”
지난주 <한겨레>에 소식을 전해온 그의 전화 목소리에는 회한이 실려 있었다.
김경애 기자
‘돌멩이의 노래’가 무려 38년 만에 원저자에게 찾아오기까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곡절이 많았다.
49년 경북 영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유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68년 상경해 영세 섬유업체들에서 일하며 자살기도를 했을 정도로 열악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고자 77년 초반 월간 <대화>에 ‘어느 돌멩이…’ 자전 수기를 연재했다. “조화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도시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노동자 권리와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된 덕분이었죠.”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오자마자 절판됐던 책은 84년 이래 재출간을 거듭하며 본격 노동자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정작 필자 유씨는 책의 유명세를 모른 채 30년 가까이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했다. “책을 낸 뒤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니며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연을 하러 다녔는데 81년 여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어요.”
5공화국 정권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혐의로 노동자·학생 24명을 구속시킨 이른바 ‘학림사건’에 연루된 것이었다. 한달간 경찰병원에 3차례 실려가야 할 만큼 극심한 고문을 당한 그는 내내 서대문구치소 병사에 수감될 정도로 건강이 망가져 1심에서 유일하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출소 이후 그의 삶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87년 대선 때 구로구청 부정 투표함 투쟁 때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로 또다시 옥살이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심해졌어요. 혼자 있으면 잡혀갈 것 같아 집을 나가 몇 달씩 노숙자 생활을 되풀이하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죠.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스스로 잊혀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고문’이란 단어조차 두려워 고통 속에 갇혀 지내던 유씨는 2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2012년 11월 국회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에서 토론자로 나와 고문 피해 경험을 공개 증언한 것이다. “2011년 11월 김근태 의장이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갔다가 고문당한 그 자리에서 처음 얘기를 했지요.” 그때부터 주위의 권유로 정신과 치료와 인권의학연구소의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한 그는 차츰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12년 6월 학림사건 재심을 통해 무죄도 확정됐다.
지난달 유씨에게 ‘돌멩이의 노래’를 전달해준 이노우에는 21일 전자우편 인터뷰를 통해, 애초 하야시와 함께 곡을 만들게 된 계기도 ‘고문 반대 운동’이었다고 밝혔다. “하야시는 작곡으로, 나는 포크송 가수로,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시작된 일한연대운동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사이인데, 77년 ‘재일동포 사업가 위장간첩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강우규씨의 구명을 위해 78년 한국에 갔다. 불법 구속과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얘기를 듣고 강씨를 직접 면회하려고 간 것이다. 사이타마시에 살던 강씨와는 이웃이기도 했다.”
그때 한국 민중가요의 강한 메시지에 끌린 두 사람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 도쿄 신주쿠의 한 서점에서 <어느 돌멩이의 외침: 삼원 스웨터공장(100% 일본 자본) 노조 결성 투쟁 보고집>으로 번역된 유씨의 책을 보고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가사는 투쟁 보고집 맨 앞장에 실린 설창수 시인의 시를 그대로 번안했다. “하야시는 한국의 투쟁에 대한 연대의 뜻을 담아 한국적인 8분의 6(4분의 3)박자로 지었다. 그즈음 인기 있던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역시 같은 박자였다. 일음협에서 주최한 ‘제11회 일하는 자의 음악회 특별기획: 아시아를 노래한다’에서 하야시가 직접 불러 첫선을 보였다.”
악보집에는 ‘불안정한 리듬과 경쾌한 멜로디가 무기 없이 싸우는 한국 민중이 스스로를 돌멩이에 견줘 맨손으로 권력에 맞서는 강한 결의를 표현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여 놓았다.
작곡자 하야시는 도쿄예술대 작곡과를 나와 일본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시민합창모임인 우타고에와 그 갈래인 일음협에서 동시에 활동했고, 2012년 작고 직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음악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음악가로 알려졌다.
지난달 이노우에가 38년 만에 서울에 다시 온 계기도 ‘고문 반대 운동’이었다. 역시 사이타마에 살며 20년 넘게 교유해온 재일동포 가수 이정미씨의 ‘고문 피해자의 날’ 축하연주단에 동행해 공연 뒤풀이에서 “기적처럼” 유씨를 만난 것이다.
결혼 적령기 딸을 위해 이혼을 해야 했던 유씨는 인천에서 홀로 살며 ‘돌멩이들의 삶’을 지키는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이 보여주듯, 민주주의가 잠들 때 고문의 망령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습니다.”
ccandori@hani.co.kr
6월16일 국회에서 열린 유엔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 뒷풀이에서 함께 한 유동우(앞줄 가운데)씨와 이노우에 시게루(뒷줄 왼쪽 셋째) 등 일본 방문단 일행.
유동우 자전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청년사·1984년)
1978년 일본 작곡가 하야시 히카루가 지은 ‘돌멩이의 노래’ 악보. ‘눈이 있는 돌멩이처럼 낀 먼지 투성이 되어 그들은 간다 가야할 그곳으로 소리 있는 돌멩이처럼 힘찬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을 간다 가야할 그곳으로 산에 들에 돌멩이처럼 고향도 사랑도 없는 돌멩이처럼 바람과 서리를 맞아 그들은 계속 기다린다 와야할 그 사람을 힘껏 던진 돌멩이처럼 그놈들을 향하여 돌진하면 돌멩이 모두 불똥이 될것이다.’ (설창수 시)
‘돌멩이의 노래’가 실린 일본음악협의회의 악보 해설집.
‘돌멩이의 노래’ 작곡가 하야시 히카루(1931년~2012년)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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