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붙을 것 같니” “만나는 사람은 있냐”
한숨 나오는 취준생·싱글 ‘추석대피소’ 피난
한숨 나오는 취준생·싱글 ‘추석대피소’ 피난
명절에 백수는 눈칫밥을 먹는다. 허리 펼 겨를 없는 며느리도 아닌데, 일감 없이 텅 빈 손이 무안하기로는 일등이다. 제 짝 눈치를 보던 사촌형은 부엌으로 사라지고, 비글 같던 조카조차 낮잠이 든 순간. 거실에선 적막이 흐른다. “…시험 준비는 잘 되가냐?” 땀이 흐른다.
최근 ‘명절 대피소’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명절에 모인 친척들의 질문 공세가 두려운 취업준비생들이 집을 나와 ‘피난’한다고 해서 이름도 ‘대피소’가 됐다.
추석 연휴엔 도서관도 문을 닫는다. 게다가 하반기 공채는 9월에 마감이 몰린다. 파고다어학원은 지난해 추석 연휴에 학원 강의실을 무료로 개방했다. 잔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공부가 ‘도피처’인 취준생들은 반색했다. 방문객들에겐 명절 ‘비상식량’도 나눠줬다. 호응이 좋아 올 추석에도 문을 연다. 연휴 기간 내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지자체도 가담했다. 성남시청사 9층 옛 시장실을 시민들을 위한 휴게공간으로 바꾼 ‘하늘북카페’는 14~18일 추석 연휴 기간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취업준비생과 수험생 등을 위한 배려다.
취업문을 통과해도 ‘대피소’가 필요하다. 싱글은 명절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지난번에 만났던 그 아가씨 괜찮던데, 결혼 생각은 없다니?” 차인 것은 카톡인데, 실연은 전체 공개다.
13일 잡코리아가 직장인 19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미혼 남녀들은 올 추석 가장 듣기 싫은 말로 “결혼은 언제 하니”(남 57.7%·여 60.3%)를 꼽았다고 한다. 미혼 남성의 경우 “애인은 있니”(31.8%)가 듣기 싫은 말 2위를 차지했다. 미혼 여성인 ㄱ씨(37)는 “동생 둘째 돌잔치에서 ‘넌 대체 아무도 없니?’ 하는 말을 듣고 두 달 째 본가에 안 갔다. 이번 추석에도 당일만 들르고 ‘방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본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싱글들에게 일시 ‘대피소’라면 북카페가 제격이다. 명절 단골 외출 장소인 영화관이 용돈을 받은 10대 학생들, 커플, 단체로 나온 가족들로 시끌벅적한 반면, 북카페는 고즈넉하다.
북카페 ‘퇴근길 책한잔’(@booknpub)은 올 추석 연휴 내내 ‘명절 대피소’를 운영한다. 책을 읽으면서 술도 마실 수 있다. 철저한 ‘3free 존’을 표방하는데, ‘잔소리 free(없음)·눈칫밥 free·커플 free’라는 뜻이란다. ‘혼술’ (혼자 먹는 술) · ‘혼밥’ (혼자 먹는 밥) 이 뜨는 시대지만, 아직까지는 어쩐지 멋쩍다. ‘책맥’(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비교적 부담 없다.
‘에디토리얼 카페 비플러스’(@bplus395)도 심야까지 문을 여는 북카페다. 추석 당일(15일)만 빼고 낮 12시부터 자정까지 문을 연다. 김진아 비플러스 사장은 “추석 전날부터 다음날까지 명절에는 특히 혼자 오시는 분들이 많다. 주말이 되면 커플의 비중이 늘어난다”고 귀띔했다.
싱글족들에게 맥주 같이 도수가 높지 않은 가벼운 술을 즐기는 트렌드가 자리 잡으면서 속속 들어선 ‘맥주전문판매점’들도, 추석 연휴 기간 문을 열고 있다. 비어슈퍼 본점(홍대)은 추석 연휴에 문을 연다고 트위터(@Beer_Su)를 통해 공지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파고다 어학원 홈페이지의 ‘명절대피소’ 공지
‘퇴근길 책한잔’의 명절대피소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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