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한글날 예쁜 엽서 공모전 수상작과 우수 출품작들이 전시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광장에서 시민들이 한글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민 전시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신문사와 서울시가 공동으로 진행한 이번 공모전에는 4240건의 작품이 접수돼 34편이 수상작으로 뽑혔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잇츠 어 뷰티풀 나잇~”(It's a beautiful night)
지난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 양원주부학교 별관에 마련된 교실에는 25명의 주부가 미국 팝가수 브루노 마스의 인기곡 ‘메리 유’를 선생님을 따라 한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부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이 학력을 취득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다.
성숙희(70)씨는 3년 전 주부학교 중학교 과정에 입학해 로마자 알파벳부터 배운 늦깎이 학생이다. ‘영어 까막눈’으로 평생을 살았던 성씨는 생활 속에서 번번이 어려움을 겪었다. 성씨는 얼마 전 고장 난 냉장고를 수리하기 위해 애프터서비스(AS)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제품명을 알려달라’는 부탁에 성씨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제품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냉장고 앞에 적힌 글자는 영어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알파벳으로 불러주세요”라는 직원의 부탁에 성씨는 한자씩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디(D)... 에이(A)... 이(E), 더블유(W), 오오(OO)라고 쓰여 있네요”. 성씨는 “우리 집 냉장고가 대우에서 만든 건지 그때 알았다니까요. 자식이나 손주들하고 이야기할 때 외국어가 섞이면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소외감이 들어서 주부학교에 입학했어요. 여기서 알파벳이라도 배운 거죠”라고 말했다.
같은 주부학교에 다니는 원영해(61)씨는 얼마 전 “파리바게뜨에서 빵 좀 사다 달라”는 딸의 부탁을 받았다. 원씨는 ‘파(빠)리바게뜨면 알파벳 비(B)로 시작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동네 어디에서도 알파벳 비로 시작하는 빵집을 찾을 수 없었다. 원씨는 파리의 에펠탑 모양이 그려진 간판을 보고 짐작으로 파리바게뜨 매장을 찾아냈다. “파리바게뜨 간판은 알파벳 피(P)로 되어 있더라고요. 자존심 상해서 딸한테 파리바게뜨 철자가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탈북민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2004년 함경북도에서 탈북한 이아무개(68)씨는 최근 ‘세븐마트’ 앞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해 약속 장소 근처로 갔지만 간판을 찾을 수 없어 20분 동안 길을 헤맸다. 결국 이씨는 행인을 붙잡고 “세븐마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행인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지금 서 있는 곳이 세븐마트 앞이에요”라고 알려줬다. 이씨는 “일상 대화에서도 영어가 너무 많이 쓰이니까,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혼자 추측하고 대답하는 경우도 많다”며 “북한에서 왔다 해도 젊은 사람들은 금방 배우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기가 어렵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표와 간판 등에 적힌 과도한 외국어 표기에 남모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행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을 보면,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 맞춤법,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해야 하고,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한글문화연대가 조사한 ‘간판 및 상호 언어에 나타난 외국어·외래어 사용 실태’ 보고서를 보면, 서울 지역 간판 1만2151개 가운데 한글 간판은 42%(5094개), 외국 문자 간판이 23%(2828개), 한글과 영어를 함께 쓴 간판이 35%(4209개)로 나타났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영어 공부를 할 기회를 얻지 못한 노인들이 과자봉지가 영어로 되어 있으면, 손주들에게 과자도 사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영어 사용이 과다하면 영어를 잘하는 젊은 세대와 영어 못하는 노년 세대 사이에 세대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수진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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