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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인터뷰 전문

등록 2016-10-14 21:48수정 2016-10-14 21:59

어떤 페이지인가?

-페이지 개설은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들게 됐나? “ㅇㅇㅇㅇㅇ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라고 페이지를 소개한다면 어떤 수식어가 적당할까?

페이지를 처음 만든 것은 2016년 5월 초. 운영진들은 모두 성차별과 폭력으로 얼룩진 여성의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온라인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 이용자들의 목소리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닌 불편함이 ‘예민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우리가 스스럼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데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운영진들 각자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즈음 온라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 그간 마음속에 쟁여둔 무수한 이야기들을 속 시원히 풀어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페이지가 바로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었다.

처음엔 페이지 구독자 수가 이렇게까지 늘어날 줄 몰랐다. 금세 천 명을 넘어 오천 명에 다다르자 책임감 같은 것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SNS에서 팔로워나 구독자의 숫자는 일종의 ‘발언 권력’이다. 우리 운영진들 중에 그런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일이 너무 커진 듯해 페이지를 이쯤에서 닫을까 우리끼리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우리 페이지가 많은 힘이 된다고,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고 메시지를 통해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늘어나 있는 상태였다. 어쩌다 보니 만 명이 넘었고 조금만 있으면 만 오천 명이 된다. 웬만한 페미니즘 웹진/언론보다도 구독자 수가 많다. 이왕 발언 권력이 생겼다면 마음껏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요새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페미니즘 페이지들이 눈에 띄면 좋은 게시물을 골라 우리 페이지에 공유한다. 온라인 페미니즘 페이지들의 ‘허브’ 역할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페이지를 만들었을 때와 비교해 목적이 조금 달라진 셈이다. 분명 소중한 목소리들임에도 우리만큼의 발언 권력을 갖지 못한 목소리들을 더 많이 드러내고 싶었다.

수식어는 생각해 본 적 없다. 품고 있는 이상을 묻는 것이라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모든 목소리들이 힘을 얻어 가는 곳이면 좋겠다는 바람? 페미니즘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겨난 목소리가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는 늘 우리 주변에 있었지만 남성 중심 사회가 그것들을 항상 은폐하고 억압해 왔다. 원래 있던 다양한 목소리들의 진폭이 이 세상을 고루 진동시킬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사실 수식어가 붙으면 아무래도 그 수식어가 수식하지 못하는 목소리는 담아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그게 우리가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운영자가 다섯명이라고 들었다. (여성신문 7.28) 페미니즘을 공부 또는 연구하시는 분들인지? 운영자들은 어떤 사이인지? ‘대면 인터뷰가 힘든’ 이유는?

우리는 신상 정보에 매우 민감하다. 아마 현재 존재하는 페미니즘 계열 페이지들의 운영자들도 전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여성의 사진과 신상 정보가 멋대로 남초 커뮤니티에 돌면서 성희롱과 인신공격 등으로 마구 ‘능욕’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 트위터에는 그런 ‘능욕’을 전문으로 하는 계정들이 많지만 경찰은 수사는커녕 뒷짐 지고 방관만 한다. 그런 와중에 페미니즘 페이지를 운영하는 우리의 신상 정보가 조금이라도 새 나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한마디로 두렵다. 그래서 대면 인터뷰는 물론이고 이메일로 주고받는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이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이스북 메시지라는 비교적 안전한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는 밝힐 수 없다. 현재 페이지 운영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다섯 명이고, 각자의 직업도 다 다르다. 다만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점이 비슷해서 뭉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하필이면 ‘페미니즘’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여성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엉망이니까. 예를 들어 노동자들 몇 만 명이 광화문에 모여 집회를 열면 한겨레든 조선일보든 일단 기사는 나온다. 그러나 노동운동 판에서 벌어지는 성희롱이나 성차별에 대해서는 어느 언론도 말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부양의무제 철폐를 외치면 몇몇 언론에서나마 기사로 다룬다. 그러나 여성장애인들이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서 조사하려면 인터넷을 한참 뒤져야 한다. 똑같은 성소수자지만 레즈비언들이 겪는 차별은 게이들이 겪는 차별과 또 다르다. 다른 소외 계층의 여성들도 다 마찬가지다. 그게 문제인 것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의 문제를 다른 사회적 문제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습관들. 어디에도 있는 현실을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 답답했다.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야호 하고 외치는 심정으로 시작한 것이 이 페이지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라는 페이지 문패는 어떤 의미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좋아한다는 것이 운영자들의 공통된 취향이었다. 페이지 이름을 정하면서도 그 애니의 제목에서 따오는 것이 좋겠다고 쉽게 의견을 모았다.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이 세상 속 고통과 슬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나우시카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먼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깎아지른 듯 오롯이 서 있는 계곡의 이미지인 ‘바람계곡’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우리의 처음 마음가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0월3일 기준 좋아요수가 1만3841명이다. 남녀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래도 페이스북이다 보니 연령대가 2030 위주일 것 같은데, 이들을 대상으로 페이스북에 둥지를 튼 이유가 따로 있는지?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연령대’라고 본 건가?

현재 여성이 75%, 남성이 25%로 나온다. 연령대는 주로 20대와 30대. 그러나 40대 이상과 10대도 적지 않다. 구독자 수가 5천 명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남성 구독자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를 남성들도 여성의 현실에 뒤늦게나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주변 여성들에게 자신이 페미니즘 페이지를 구독한다는 사실을 어필하려는 남성들이 늘어난 결과라 생각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더 많은 남성들이 우리 페이지의 게시물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

페이스북에 둥지를 튼 이유는 당시 운영진들이 페이스북 말고는 SNS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야호를 외치고 싶었을 뿐 장소는 산이든 바다든 중요하지 않았다. 운영진들에게 페이스북이 익숙했을 뿐이다. 물론 여성혐오/인권침해 페이지들은 그대로 방치하면서 페미니즘 관련 게시물이나 페이지는 무차별 삭제하는 페이스북의 횡포를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하면서도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페미니즘 페이지를 페이스북에 만드는 게 맞나? 끝까지 보이콧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종의 오기도 있었던 것 같다. 너희들이 우리 목소리를 삭제하려 해도 우리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 뭐 이런? 누가 우리 페이지의 게시물을 읽게 될지는 사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읽을 테면 읽고 싫으면 말라는 식이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런 마인드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특정 연령대에 맞춰 게시물을 작성하진 않는다. 다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평이한 언어로 말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고상한 페미니즘 이론이라 해도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페이스북 프로필에 으리으리한 학벌을 잔뜩 걸어놓고 틀에 박힌 번역투 문장으로 전공자들이나 알아먹을 수 있는 기괴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SNS에서 주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일종의 ‘네임드’가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온라인 페미니즘’은 현실 속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아닌 인터넷 ‘네임드’의 그럴 듯한 ‘글빨’ 위주로 굴러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언젠가는 한계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SNS에 존재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단지 ‘네임드’의 팔로워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적극적으로 발굴해 드러내는 일을 누군가 해야 할 텐데 우리의 역량이 그 정도까지 되진 않아서 아쉽다.

-하루 평균 4~5개 게시물이 올라오는데, 운영자 다섯명의 ‘역할 분담’이 있나? 페이지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운영 원칙 같은 게 있는지(명문화하지 않았더라도) 궁금하다.

역할 분담 같은 건 없다. 각자 그날그날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기사를 훑거나 메시지를 통해 들어오는 제보를 체크한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글로 풀어내기도 한다. 처음엔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운영진 모두의 검토를 거쳤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고, 운영진이 함께 검토해야 하는 사안인지 아니면 혼자 처리해도 되는 사안인지 운영진 각자가 알아서 판단한다. 운영 원칙이란 게 있다면, 민감한 사안이 아닌 한 운영자 개개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TV 프로그램이나 뉴스, 영화 등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전파하는 여성 차별적인 표현과 내용을 지적하는 게시물을 보면서, ‘아 이런 것들도 여성차별, 나아가 여성혐오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이런 성격의 콘텐츠를 통해 페미니즘을 전파해보자’고 결심하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는지?(*앞선 질문에서 충분히 설명하셨다면 넘어가도 됨)

이미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근데 ‘페미니즘을 전파해 보자’라는 식으로 거창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단지 미디어 속 성차별적 요소들이 몹시 불편했을 뿐이고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예민하거나 까탈스런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만 불편하면 억울하니 다 함께 불편해보자는 생각? 불편함을 만들어 내는 저열한 존재들, 여성 혐오자들과 성차별주의자들에게 엿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 페미니즘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공격하는 일은 달걀로 바위치기에 불과하겠지만 그럼에도 달걀을 계속해서 던져 바위를 더럽히기라도 해 보자는 생각? 뭐 그런 생각들.

-가장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던 게시물 두 개 정도만 소개해 준다면? ‘의미 있는 내용이었다’고 생각되는 게 있거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올린 게시물들이 있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연대하여 성차별 구조와 맞서기 위해선 먼저 남성들이 자신의 ‘잠재적 가해성’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작 게시물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셨다. 7월 초에 있었던 ‘경복궁 생리대 시위’의 정당성에 대해 여성과 남성의 대화 형식으로 논한 글도 있었다. 그 게시물을 올린 뒤 며칠 동안 하루에 삼사백 명씩 구독자가 늘었다. 최근에는 그동안 페이지를 운영하며 보고들은 여성혐오적 ‘망언’들을 코멘트와 함께 정리해 올린 게시물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를테면 ‘남성의 성욕이 여성의 성욕보다 강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런 망언은 듣기엔 어처구니가 없지만 막상 반박하기엔 매우 귀찮다. 요새 쓰는 말로 너무나 ‘빻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의 불가항력적인 성욕’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많은 남성들의 머릿속에 못 박혀 있다. 그런 망언들 하나하나에 대고 침을 뱉어 주고 싶었다.

-페이지를 5월6일에 만들었는데, 약 10일 뒤(17일)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심경은 어떠했는지? 잠재적 가해자로의 남성의 성찰을 다룬 연재 게시물 등을 작성할 때 마음가짐이나 각오 같은 것도 남달랐을 듯한데.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사건 직후 남성들의 반응이 더 경악스러웠다. ‘일부 남성’이라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남성들이 저마다 자기만은 결백하다며 ‘모든 남성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서로 친하게 지내요’라고 적힌 피켓을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들고 나온 일베 이용자는 모든 갈등과 투쟁을 거부하고 억누르려는 가해자들만의 평화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개중에는 남성 젠더의 잠재적 가해성을 인정하고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한국 남성들 대다수가 남성성이라는 권위 의식을 마치 자신의 명예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성차별 구조에 대한 폭로를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실제로 남성의 폭력에 무수한 여성들이 희생되는 현실은 아랑곳없이 고작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을 더 우위에 두고서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 ‘일반화’라는 단어의 사용은 남성들의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모든 남성이 범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성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화하지 말라’는 요구가 남성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들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런 남성들의 기만을 까발리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라 지적하는 것은 남성들 모두가 범죄자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밤거리에서 어떤 남성과 마주치든 일단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입장과, 여성을 폭행할지 말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남성의 입장은 애초부터 다르다는 의미다. 현존하는 성차별 구조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남성들 스스로가 차별 구조의 가해자적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 성범죄를 비롯한 여성 대상 범죄의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돌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여성이 조심하지 않아서 강간당했다?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아서 살해당했다? 21세기인 요즘에도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여성을 상대로 작동하는 거대한 성차별 구조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왜 여성들이 이런 부당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남성들 대부분은 ‘나는 결백하다’에서 생각을 멈춘다. 생각을 멈추지 말고 더 고민하라고 요구하고 싶었다. 당신들이 고민하지 않으면 이 폭력과 죽음의 행렬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 됐다~는 메시지들을 자주 받는지? ‘다 아는 얘기를 우리끼리 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회의감이 들 땐 없는지?

자주 받는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뭔가 참 송구스러워지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그게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니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올리는 게시물을 읽는 건 주로 여성들이지 여성혐오에 찌든 사람들이 아니다. 설사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게시물이 도달한다고 해도 그들은 웬만해선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설득 불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페이지 운영을 시작했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은 여성 혐오자나 성차별주의자를 설득하기 위해 있는 페이지가 아니다. 차라리 치열한 논쟁에 지친 여성들에게 정신적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면 모를까. 그래서 회의감도 없다. 어차피 모든 운동이 그렇지 않은가. 끈질긴 쪽이 이긴다. 우리가 못한다면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이 이어서 해 줄 것이다. 이른바 온라인 페미니즘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80년대 이후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페미니즘의 흐름에 많은 빚을 졌다. 우리 페이지도 한국 페미니즘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모래알 한 톨의 몫이라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욕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 질문과 유사한데) 페이지를 반년 남짓 운영하면서,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꼈던 경우, 반대로 절망감을 느꼈던 적은 없나?

우리는 남성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 페이지 덕분에 자신이 그간 품어 온 생각들이 180도 바뀌었다며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남성분들이 가끔씩 있다. 이제는 여성의 현실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싶다거나 그동안 여성혐오자로 살아 온 것 같아 부끄럽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사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내용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뿌듯해진다. 우리가 헛짓거리만 하고 있는 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메시지로 보내는 여성분들이 있다.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성폭행 등과 관련된 끔찍한 경험을 글로 적어 보내 주시는데 꼭 말미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다. “여기밖에 말할 곳이 없었어요.”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든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페이지를 꾸준히 운영해 나가는 것뿐이다.

“넌 메갈리안인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아마도 남성이 되겠으나-‘페미니즘을 주장,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페이지 댓글이나 메시지로 이런 류의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웹사이트 메갈리아와 어떤 관계인지, 메갈리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넌 메갈리안인가?’라는 물음은 6.25 전쟁 시절 총부리를 들이대며 “넌 (남쪽과 북쪽 중) 어느 편인가?”라고 물었던 것과 동일한 수준의 ‘사상 검증’이다. 남한과 북한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체제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물음에 사상의 자유란 없다. 마찬가지로 “넌 메갈리아인가?”라고 묻는 물음엔 메갈리아가 되든지 아니면 그 반대편에 서든지 이 두 경우의 수 말고는 없다. 이를 우리는 ‘젠더 매카시즘’이라 부른다. 물음을 가장한 ‘낙인’인 것이다. 사실 ‘메갈리안’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메갈리아 웹사이트 이용자? 아니면 페미니스트 전체? 너는 메갈리안이냐고 묻는 사람들 중에 메갈리안이 정확히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지 밝히는 사람을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메갈리아는 그저 일개 커뮤니티의 이름일 뿐인데 말이다. 심지어 요즘은 예전에 비하면 올라오는 게시물도 거의 없다.

물론 메시지를 통해 그런 질문들이 가끔씩 들어오지만 그때마다 철저히 무시한다. 우리는 ‘메갈리안’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른다. 그래서 “넌 메갈리안인가?”라는 물음엔 대답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물음의 배후에 있는 의도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낙인을 찍고 싶은 상대에게만 그런 물음을 던진다. “네, 메갈리안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꼴통 페미’가 되고 “아니요, 메갈리안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착한 페미’가 된다. 우리는 둘 다 거부한다.

-페이지 개설 배경에 대해서...“메르스 갤러리와 메갈리아 이용자들의 목소리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답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좀더 설명해줄 수 있나?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이 책 속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여성의 일상 속에, 생생한 삶 속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여성들이 모여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디서도 보고들을 수 없는 훌륭한 페미니즘 강의가 되었다.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의 게시판은 할 말 많은 여성들의 사랑방이기도 했지만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겨누는 무기를 만들어내는 대장간 역할도 했다. 여성들은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대체 무엇이 여성의 삶을 형편없게 만드는지 명확히 규정할 수 있었다. 남달리 ‘예민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하는 불편함을 더는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운영진들은 전부 그러한 움직임에 크게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책 속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각자 자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 페미니즘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덕분에 우리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마음속에 쌓인 말들을 더는 꾹 눌러둘 필요가 없겠구나. 아마 그렇게 생각한 건 우리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 덕분에 많은 여성들이 전보다 덜 외로워질 수 있었고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으며 더 당당해지게 되었다. 우리도 어떻게 보면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가 낳은 바로 그 수많은 영향들 중 일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는 인터넷 커뮤니티일 뿐이다. 커뮤니티엔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그중엔 차분한 사람들도 있지만 다소 흥분한 사람들도 있다. 일부 분노한 여성들의 정제되지 않은 거친 언어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었다. 거칠지 않은 언어로 분노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언어는 우리들의 취향과는 다르다.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가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이들이라면 우리는 그 바위가 왜 달걀을 맞아야 하는지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쪽이다. 우리는 ‘미러링’을 하지 않는다. 미러링이 나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러링은 지금까지 행해진 것보다 더 과격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쪽 커뮤니티 이용자들과는 전혀 교류한 바가 없다. 같은 적과 맞서 싸운다고 해서 반드시 교류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메르스갤러리도 메갈리아도 이젠 이름만 남았지 활동은 없는 커뮤니티가 되었다. 일종의 ‘브랜드’가 된 것이다. 성차별주의자들은 ‘메갈리아’라는 이름을 페미니스트들에게 찍는 낙인처럼 사용한다. 페미니스트들에게 ‘메갈리아’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암호’가 되었다.

우리 페이지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여성혐오적 콘텐츠만 다루는 페이스북 페이지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김치녀 시즌2’라는 페이지의 구독자 수는 무려 18만 명이다) 우리 페이지 같은 곳도 하나쯤 버텨 주는 것이 뭔가 ‘온라인 페미니즘’이라는 움직임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는 것 같긴 하다.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운영자들도 저마다 생활이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페이지를 운영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처음부터 기존의 여성주의 운동 진영과의 연대나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의 움직임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부담 없이 페이지를 시작할 수 있었고, 그러한 ‘부담 없음’은 지금껏 페이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꽤나 큰 동력이 되어 왔다. 어쩌면 ‘부담 없음’이 사라져 버리는 순간 우리 운영자들은 일제히 페이지를 그만둘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단순히 페이지에 날마다 게시물을 올리는 것을 넘어 뭔가 더 큰 틀의 연대를 구성해 보고 싶은 고민은 운영자들 모두에게 있다.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 오천 명이다. 작지 않은 숫자다. 더구나 메르스갤러리와 메갈리아 이후의 온라인 페미니즘은 우리가 보기에 아직 방향성이 분명하게 잡히지 않았다. 여성혐오적 콘텐츠들에 대해 SNS에 불편함을 쏟아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어떻게 하나로 엮을 수 있을지, 여성민우회나 여성노조처럼 지금까지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 온 단위들과는 또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근데 우리끼리만 고민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존의 여성주의 운동 진영’과 메갈리아 혹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등장한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의 연대, 즉 온/오프라인 진영의 연대 없이는 지난 일 년 동안의 흐름이 흐지부지될지도 모른다. 우리 페이지는 이 상황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답을 찾지 못했다.

-메갈리아가 비판받는 대목은 아마도 ‘혐오에 혐오로 맞선 방식’ 미러링 때문이 아닌가한다. “남여 차별도 반대하지만 메갈리아(의 혐오)도 반대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한겨레 구성원이나 독자들 중에도 상당수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불의에 맞선 저항이 항상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즉 동학농민운동이든 3.1운동이든 4.19든 5.18이든 6월 항쟁이든 광우병 촛불집회든 민중총궐기든 그들에게는 죄다 폭도들의 난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안중근은 총으로 사람을 쏴 죽였고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그들은 아마 안중근과 윤봉길도 테러리스트라 부를 것이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들의 기준으로는 시민군이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벌인 5.18도,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한 6월 항쟁도, 경찰 버스를 부순 민중총궐기도 전부 불법 폭력 집회다. 왜냐고? 폭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 그러나 폭력이 위치한 사회적 맥락을 따질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불의에 맞선 저항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가장 큰 폭력의 편에 선 존재들만이 폭력을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국가 폭력의 편에 선 사람들은 정부에 맞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의 저항을 얼마든지 폭력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체주의적 권력 집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러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을 ‘한남충’이라 부르는 등 거친 언어로 이루어진 미러링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참다못해 터트린 비명과도 같다. 데이트폭력으로 사흘에 한 명 꼴로 여성이 사망하는 나라. 성범죄가 25분마다 한 건씩 발생하는 나라. 남성의 가사노동 분담 비율이 OECD 꼴찌인 나라.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가 OECD 1위인 나라. 여성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OECD 1위인 나라. 성인 남성들 중 절반이 성매매 경험이 있는 나라. 성폭행 피해자를 ‘꽃뱀’이라 부르며 조롱하는 나라. ‘몰카’ 걱정 때문에 공중화장실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는 나라. 보복당할까 두려워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못하는 나라. 스토킹 범죄로 연행돼도 고작 벌금 10만원이면 풀려나는 나라. 판사가 성폭행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해 주는 나라. 성범죄의 원인을 여성의 ‘짧은 치마’나 ‘늦은 귀가’에서 찾는 나라. 국가가 나서서 출산율을 걱정하지만 정작 육아휴직을 쓰면 그대로 해고당하는 나라. 한국 여성들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는가? 부처님이라도 등을 돌릴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이처럼 끔찍하리만치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미러링은 어떤가? 고작 거친 언어가 전부다. 애초에 혐오 대 혐오라는 구도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다. 둘은 동급이 아니다. 여성혐오는 현실 속에서 다양한 차별과 폭력의 형태로 여성을 억압한다. 그러나 미러링은 컴퓨터만 끄면 벗어날 수 있다. 여성은 강간당할까 두려워 밤거리를 다니지 못하지만 미러링이 두려워 컴퓨터를 못 켜는 남성은 없다. 미러링은 이미 적잖은 학자들마저 지적했듯 남성 중심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폭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니 남성 중심 사회가 부여한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은 남성들에게 미러링은 적잖이 불편할 것이고 ‘폭력’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미러링은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설사 미러링을 언어폭력이라 규정한다 해도 그 폭력은 남성 중심 사회의 가부장적 권력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맥락 위에 있다. 안중근의 총알과 윤봉길의 폭탄을 테러리즘이라 불러선 안 되듯 미러링을 폭력이나 혐오로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언론들이 여성혐오 대 남성혐오라는 그릇된 프레임을 사용한다. 그러나 둘은 동등한 혐오가 아니다. ‘저항 대 폭력’ 혹은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프레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미러링을 두고 남성혐오라 치부하는 사람들은 언어로 표현될 뿐인 모욕이 여성에게 실제로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보다 더 심각하다고 믿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은 9월22일 경향신문에 쓴 ‘혐오의 상승작용’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어느 쪽에서 발화된 것이건, 패륜적 언행은 모두 비난하는 게 옳다”며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메갈리안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은 어떤 생각인지?(전우용 선생의 칼럼에 대한 생각도 좋고, 전반적인 그런 사고방식에 대한 생각도 좋다)

위에서 다 이야기한 것 같다. 여성혐오 대 남성혐오라는 구도는 남성 중심의 왜곡된 관점에서 비롯된다. 혐오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구체적으로 여성들의 삶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누가 살해당하거나 구타당하고 있는지, 누구의 신체가 몰래 찍히고 있는지, 누가 성적으로 모욕당하고 있는지, 누가 차별당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알량한 분석을 위한 논리를 구축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봐야 한다는 소리다. 정치적 성향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수들이 돈과 권력 앞에서 하나로 결집하듯 진보와 보수 남성들은 자신들의 가부장적 기득권 앞에서 하나로 결집한다.

-<시사인>이 8월27일 발행한 기사 ‘분노한 남자들’에 많은 사람들-아마 남자들이겠으나-이 ‘불편함’과 분노를 드러냈다. 넥센 성우 교체 사건, 강남역 살인 사건 등 일련의 사태에서 보여지는 여성혐오 또는 여성 차별을 지적하는 흐름에 남성들이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괘씸함’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을 그들은 남성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여성 인권의 신장은 남성의 권리가 줄어드는 것’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 온 남성도 있었다. 그 남성은 이런 말도 했다. ‘내 어머니의 인권이 증가해도 내겐 아무런 이득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남성들 대부분의 인식 수준은 이 정도에서 그친다. 인권마저 제로섬 게임이라는 경제 논리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권은 윈-윈 게임이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여성 인권의 신장은 남성의 인권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는 남성에게도 획일화된 남성성이라는 굴레를 씌우기 때문이다. (요새 많이 회자되는 ‘맨박스’라는 말을 떠올리면 된다.) 가부장제를 타파하는 일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명백한 이득이다. 그런데 남성들은 그걸 모른다.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에게 부여하는 기득권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기득권이냐고?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다. 왜 성범죄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일까? 왜 성구매자의 대부분은 남성일까? 왜 고위급 공무원과 기업 임원은 대부분 남성일까? 왜 남성은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지 않아도 비난받지 않을까? 여성은 남성의 신체를 멋대로 품평했다간 엄청난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난받고 있는 여성 아무개 씨를 기억하는가?) 그러나 남성은 얼마든지 여성의 신체에 등급을 매겨 품평할 수 있고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젠더 기득권의 사례들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런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여성들이 남성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자기 손에 든 떡을 빼앗아 먹으려는 불량배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러니 괘씸한 것이다. “여자가 어딜 감히 남자한테 대들어?”라고 말하기엔 시대가 변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이렇게 말한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지 말라.” 이 말은 성차별이고 뭐고 그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다. 그래야 자신의 기득권이 무사하니까. 자신은 영원히 신사적이고 도덕적인 남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거친 목소리로 권리를 부르짖는 여성들만 흉악한 폭도로 만들 수 있으니까.

-‘남자가 피해자다,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여성들의 외침에 “남자 여자 우리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요”라고 응답하는 남성들도 있다. 왜 이런 반응을 하는 걸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요”가 아니라 “우리한테 대들지 마라”일 것이다. 현실 속에 버젓이 존재하는 갈등과 폭력을 무시한 채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평화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 친하게 지내면 물론 좋기야 하겠지. 그런데 그 평화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걸까? 가만히 있으면 평화가 저절로 굴러 들어올까? 아니다. 그들은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평화를 쟁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들만 시끄럽게 떠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친하게 지내요”는 “이제 그만 입 닥치라”는 일종의 경고다. 여성들이 ‘친하게 지내길’ 거부하는 순간 남성들이 어떻게 돌변하는지 메갈리아 티셔츠 사태를 통해 보지 않았나. ‘여자에겐 왕자님이 필요 없다.’ 이 한 마디에 남성들은 길길이 뛰었다. 오히려 여성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역차별이라는 말도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남성들이 역차별이랍시고 얘기하는 것들을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여성 고용할당제, 여성 전용 주차장, 지하철 여성 안전칸, 대학 내 여학생 휴게실 등등인데 이것들은 여성들의 특권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 여성들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라 해야 한다. 전부 다 남성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들이다. 기업의 남성 선호가 없었다면 고용할당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성 대상 범죄가 아니었다면 여성 전용 주차장도, 지하철 성추행이 없었다면 여성 안전칸도, 학내 성범죄가 아니었다면 여학생 휴게실도 전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남성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안전할 권리’를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애초에 차별이 없었으니 역차별 또한 없다. 그뿐이다. 그럼에도 절실히 역차별을 부르짖는 남성들은 특권과 권리를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는 몰상식한 존재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운영자들과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니, 나온 주변의 첫 반응은, “잘 알아보고 해라. 잘못하면 욕 먹는다”였다. 기존 언론들이 이 문제를 잘 다루지 않는 이유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정말 조심스러워서 하는 충고인지, 불편해서 하는 말인지 사실 헷갈린다. 어떻게 보는지?

이미 시사인은 정말 ‘분노한 남자들’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우리 페이지에서 한동안 시사인 정기구독 운동도 벌였지만 빠져나간 구독자의 빈자리를 다 메우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아직은 페미니즘보다 여성혐오가 돈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겨레 내부에서도 걱정이 많을 것이다. 시사인만큼은 아니겠지만 한겨레도 조중동에 비하면 영세 언론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우리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얘기도 했다. 한겨레 편집부가 분명 몸을 사릴지도 모른다, 우리 답변이 마구 칼질돼서 나갈 수도 있다, 아예 통편집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인터뷰 전문을 페이지에 공개해 버리자... 그런데 실제로 시사인 사태가 벌어진 뒤로는 언론들이 여성혐오 이슈를 다루는 빈도가 확 줄었다. 섣불리 기사를 썼다가 논란이 되거나 철퇴를 맞기 싫은 것이다. 게다가 한겨레는 경향신문이나 시사인에 비하면 유독 여성혐오 이슈에서 한발 비켜서 있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른바 기계적 중립? 우리 페이지 운영진과의 인터뷰 아이템이 편집회의를 통과했다는 것도 사실 놀랍다. 이 답변지에 적힌 내용들 가운데 얼마나 보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의 인터뷰 아이템을 통과시킨 것 자체가 한겨레 내부에서 굉장히 큰 결단을 내린 결과라 생각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 인터뷰가 여과없이 나가게 된다면 해당 기사 댓글란엔 온라인 여성혐오자들이 모두 모여 난동을 부릴 것이다. 담당 기자님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메갈’로 몰릴지도 모른다. 현재 몇몇 언론사의 기자님들이 이미 그렇게 되었듯이.

-(짧은 문장으로 정리가 되지 않겠지만) ‘바람계곡의 페미니즘’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페미니즘(다양하게 부를 수 있겠지만)을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일 수도 있고 세상을 변혁하는 실천일 수도 있다. 페미니즘이란 한마디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이기 때문에 결국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다. 인류의 절반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고서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겠다는 것인가? 노동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그 어떤 소수자운동이든 페미니즘적인 관점이 없이는 반쪽짜리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색깔이 있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즘이라 수식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우주의 색깔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동물을 보면 종마다 인지할 수 있는 색깔의 영역이 다 다르다. 특히 새는 인간의 눈보다 더 현란한 색깔을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것은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타인들이, 그 총천연색의 삶들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남성중심 가부장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찬성이든 반대든,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논하는 게 조심스럽다~는 게 많은 남성들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의견을 말하자니 조심스럽고, 공부를 하자니 부담스럽고…‘뭔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긴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간단하다. 지금 내가 발언을 해도 되는 상황인지 주변에 있는 여성에게 물어보면 된다. 여성들은 일상 속에서 늘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아 왔다. 남성에게 발언권을 얻지 않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들다. 남성들은 일단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가르치고 설교하려 하기 전에 여성들에게 발언권을 부여받는 것부터 훈련해야 한다. 자존심이 상한다 해도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가부장제의 잔재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페미니즘은 ‘공부’로 달성할 수 있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무심히 바라보던 풍경을 찢어발기는 것이다. 여성의 삶에 비해 남성의 삶에는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한 무수한 기득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사회 구조 자체가 남성 위주로 구축된 거대한 성차별 구조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전부 추상적인 것들이다. 정말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겼다면 일단 페미니즘이란 어려운 단어 자체는 잊어버려라. 대신 주변에 있는 여성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어머니도 좋고 배우자도 좋고 누나나 동생도 좋다. 친구도 좋고 직장 동료도 좋다. 먼저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여성의 일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다. 아마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다. “몰카 때문에 공중화장실에 갈 때마다 주변을 꼼꼼히 수색한다고요?” “살면서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다들 한 번씩은 있다고요?” “몸에 붙는 옷을 입으면 남자들이 뚫어지게 바라본다고요?” “택시에서 내릴 때 카드로 계산하려고 하면 거부당한다고요?” “화장 안 하고 출근하면 예의 없다는 소릴 듣는다고요?” 등등등.

이야기들을 충분히 들었다면 이젠 일상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한다든가, 성매매를 더는 하지 않는다든가, 성희롱과 다를 바 없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든가, 성폭행 피해자를 ‘꽃뱀’이라 부르지 않는다든가... 전부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다. 당연하다. 페미니즘은 어려운 이론일 수 있지만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겼다면 인간답게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남성에게 부여된 젠더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생존의 문제다.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혐오 범죄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성폭행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무분별한 성적 대상화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취업 시장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여성들에겐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위 질문과 비슷한데..) 바람계곡의 페미니즘 페이지나 최근 일련을 사건들을 본 뒤, ‘연구를 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페미니즘은 좀 알아야겠다. 삶에서 실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무엇부터 해야하는지?

페미니즘만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가령 노동문제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무엇을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공감하듯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는 과정에 첫 발을 내딛는다면 이미 페미니즘의 반은 알게 된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듣는 연습이 가장 중요하다.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여전히 불안하고 절망스럽지만 그래도 함께 절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더라. 궁극적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일 년 전을 생각해 보라. 메르스 갤러리와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인터넷을 뒤덮은 이후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지 않나. 17년 동안 방관만 하던 경찰을 움직여 소라넷이라는 희대의 음란 사이트를 폐쇄시킨 것은 변화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진짜 변화는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현장에 나와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외친 여성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여성들은 더는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다. 남성의 통제와 폭력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원한다. 미디어에 넘쳐 나는 성차별적 콘텐츠와 성적 대상화에 침을 뱉고 먹칠을 한다. 여성들은 여성혐오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사회적으로 정의된 여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즉 자신의 ‘젠더’를 함께 인식하게 되었다. 한번 다른 세상을 보게 된 여성은 결코 이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지난 일 년 동안의 성과는 대단히 크다.

물론 가부장제와 성차별 구조는 단시간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인간이 파악하기엔 너무나도 느린 속도로 진보한다. 수천 년이라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뒤엎는 데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시도는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 바위를 더럽히기라도 해야 사람들이 저기에 바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페이지에서 기획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지? 향후 어떻게 운영하겠다~하는 밑그림 같은 게 있다면 함께.

생각지도 못하게 페이지 구독자의 숫자가 늘어나 버렸다. 지금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우리의 ‘발언 권력’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를 운영진들끼리 자주 한다.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지금처럼 수많은 언론 기사들을 날마다 모니터하고 거기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짚는 작업도 사실 쉽지만은 않다. 운영진 모두 페이지 운영에만 매달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따로 글까지 쓴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할 수 있을지 우리끼리도 가끔 이야기해 보는데 답은 안 나온다. 더구나 페미니즘 콘텐츠에 유독 적대적인 페이스북이 언제 우리 페이지를 삭제할지 모른다.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게 ‘내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뭔가 일회성 게시물이 아닌 좀 더 의미 있는 작업을 해 보고 싶은데, 아직 주제를 잡지 못했다.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이전에 해봤는지? 혹시 어떤 인터뷰를 기대했고, 기대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경향신문과 여성신문이 인터뷰 요청을 해 와서 응한 적 있다. 인터뷰에 딱히 기대한 지점은 없다.

진행·정리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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