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같은 때 가족 모임 자체가 꺼려집니다. 동생 이야기를 되도록 안 하려다보니 가족들 사이에 대화가 어색해져요. 어른들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무겁고 부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대물림 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30주기 기일을 하루 앞둔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박종철 열사의 형 박종부(59)씨는 지난 세월 가족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산이 세 번도 변했을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종부씨는 “우리처럼 공권력에 희생된 가족을 둔 유족들이 많은데, 그 삶이라는 게 내적으로 기둥이 무너진 처참한 삶이라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종철 열사가 숨진 1987년부터 유가협에서 활동해온 아버지 박정기(89)씨와 어머니 정차순(85)씨의 근황에 대해서도 “건강이 괜찮으시다”며 말을 아꼈다.
세월이 흘렀지만 박종부씨는 1년에 한 두 차례씩 동생을 꿈에서 만난다고 했다. 그는 “종철이를 꿈에서 만나고 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이 자신의 작은 아들과 닮아 아들의 앨범에 동생 사진을 끼워놓기도 했다. 그는 “‘동생의 피가 우리 가족을 통해서도 흐르는구나’라고 느꼈다”며 “종철이가 많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와 7살 차이가 나는 동생은 어린시절에도 어른스러웠다. 박씨가 대입 재수를 하면서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던 시절, 동생은 초등학교 졸업생이었다. 동생은 6년 동안 모은 저금통을 깨서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자전거를 사와서 형에게 건네며 “힘내라”고 응원했다. 동생이 서울대 언어학과에 합격했을 때 박씨는 다니던 서강대에 전자계산학과를 설립하고 해방신학에도 해박한 멕시코 출신 신부와 함께 동생의 대입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그는 “학교 앞 단골 주점 주인에게 주점 열쇠를 받아놓고 세 명이 밤새도록 소주 한 박스를 비운 그날이 몹시 그립다”고 추억했다.
박종부씨는 최근 촛불집회에 대부분 참여했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보듯 민주주의가 비상식적인 수준으로 후퇴했고, 빈부격차도 심해지는 등 사회가 더 질곡에 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생이 꿈꿨던 ‘민중해방’이 요즘말로 하면 ‘통일된 조국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일텐데 아직 멀어보이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촛불 집회도 줄기차게 나가고, 유가협 활동도 더욱 열심히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사진 김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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