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 브이(V)리그 올스타전에서 ‘배구계의 실세’ 세리머니가 등장했다는 이유로 ‘박사모’ 등이 조직적인 항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2일 충남 천안시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2016-2017 농협 V리그 올스타전에서 배구선수 김희진(IBK기업은행)은 팀 득점 세리머니 때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태블릿피시를 들고 나타났다. 국정농단 비선실세인 최순실씨를 떠오르게 하는 모습에 경기장에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김연경의 뒤를 잇는 한국 여자배구의 ‘실세’로 꼽히는 그의 코스프레에 관중들은 물론 동료 선수들도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배구 시즌 막바지에 열리는 올스타전은 프로팀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축제다. KOVO(한국배구협회)가 1년간 성원해 준 팬들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한다. 경기 전후 펼쳐진 선수들의 기발한 세리머니도 팬서비스의 일환이다. 공격득점을 올린 정지석(대한항공)은 드라마 <도깨비> 장면을 패러디해 검(우산)을 옆구리에 끼운 채 나타났고 다른 선수가 뛰어와 검을 뽑아주자 관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이다영(현대건설)은 황택의(KB손해보험)와 함께 ‘트러블 메이커’ 춤을 춰 열띤 환성을 자아내는 등 선수들마다 볼거리를 선보였다. 선수들 등에도 이름 대신 재밌는 멘트들이 붙었다. 전광인(한국전력)은 “부럽냐 서재덕”이라고 붙이고 나와 같은 팀 소속인 서재덕보다 자기가 인기가 높다고 뽐냈고, 서재덕은 “안부럽다 전광인”을 붙이고 나와 반박했다. 기발한 세리머니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즐겼다.
문제는 축제가 끝난 다음이었다. 김희진의 세리머니 소식이 알려지자 박사모를 포함한 일부 누리꾼들이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정유라야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도 땄지, 본인들은 국제대회 나가서 도대체 얼마나 뭘 했다고” “어느 대학 나왔나 졸업 어떻게 했나 신상 한 번 털어봐라” “게시판에 애국 국민 항의글로 도배하는 데 참여하자” 등의 게시글이 박사모 카페에 올라왔다. 김희진의 소속팀인 IBK기업은행 배구단 누리집은 악성 댓글로 도배되며 정상적 운영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23일 잠정 폐쇄됐다. 선수에게 상처가 되는 게시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다못한 팬들이 “관리가 어려우면 일시적으로 닫아달라”고 부탁한 결과다.
악성 댓글은 김희진의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이어졌고, 김희진은 결국 23일 “나는 정치에 아무 관심도 없고 실세니 비선실세니 그런 것도 관심 없다. 주최 측에서 몇몇 패러디를 지목해줘서 선수들이 한 것이다. 자진해서 그런 거 코스프레 할 사람도 아니고…. 이런 날 웃자고 한 일을 죽자고 제발 죽일 듯이 몰아넣지 말아 달라”는 글을 남기기 이르렀다. 24일 현재 김희진의 인스타그램은 접속이 되지 않는 상태다.
김희진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배구가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는 데 기여한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다. 이런 선수가 일부 누리꾼들의 악성 댓글 공세에 놓이자, 행사를 기획한 KOVO 쪽은 난감한 처지다. KOVO 관계자는 “최순실씨 패러디는 TV프로그램 등에서 여러 번 나왔던 것이어서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 정치적인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박사모들은 조직적 불매 운동까지 이어갈 태세다. “스포츠 행사에 정치적 퍼포먼스를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기업은행에 항의전화를 하고 계좌를 해지하라”는 글이 박사모 누리집 게시판에 올라온 뒤 기업은행 계좌 해지 인증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기업은행은 KOVO 쪽에 이번 사태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요구했고, KOVO는 24일 내부회의를 거친 뒤 기업은행에 사과의 뜻을 담은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또 가장 상처를 입은 김희진 선수에게도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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