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 도착하자 칸마다 중장년층 어르신이 수십명씩 쏟아져 나왔다. 지하철 개찰구 단말기 앞까지 가는 데도 10여분쯤 걸렸다.
25일 낮, 지하철을 타고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가는 길에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리는 ‘제14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 참여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 가보는 ‘탄핵 반대 집회’에서 만나게 될 어르신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머릿속으로 질문을 정리하는 동안 시청역에 도착했다.
■ 무료 교통카드 찍고 집회 현장으로
지하철 칸마다 중장년층 어르신들이 수십명씩 쏟아져 나왔다. 지하철 개찰구 단말기 앞까지 가는 데도 10여분쯤 걸렸다.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무료 교통카드가 개찰구 앞에서 오류를 일으켰다. 순간 고성이 들렸다. 인근에 서 있던 안내원들의 손길이 분주해 보였다.
어렵게 대한문 방향으로 빠져나오니, “애국 시민 여러분~”을 호명하는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운동본부’(이하 탄기국) 관계자 멘트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날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4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무대 인근에 세워진 대형 스크린에 박 대통령 취임 4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영상이 흘러나왔다. 박 대통령의 수많은 업적 중 과거 대통령들이 하지 못한 ‘핵심’ 업적을 담은 영상이라고 했다. 자막으로 소개된 박 대통령의 업적은 ‘국정교과서,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통합진보당 해산, 개성공단 폐쇄’ 등이었다. “우리 불쌍한 대통령님, 평생 의지할 곳도 없이 나라 위해 헌신했는데….” 바로 옆에서 영상을 바라보던 한 남성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가자들은 ‘우리가 뽑은 박근혜 대통령 태극기가 지킨다’ ‘박근혜 대통령 울지 마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계엄령이 답이다, 군대여 일어나라’ 등이 적힌 현수막이나 손팻말을 들었다. 진행자가 “탄핵 무효” “특검 해체” 등의 구호를 외치면, 함께 외치기도 했다.
오후 2시30분께 탄기국 쪽은 “애국시민 300만명이 (집회에)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대한문 앞에서부터 서울광장·서울시의회 앞, 숭례문까지 이어진 도로를 채운 참가자들이 300만명이나 된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이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궁금해 발품을 팔았다. 이른바 ‘애국 시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말을 걸어왔다. 적어도 50걸음에 한 번씩은 내 손에 태극기가 쥐어졌다.
이른바 ‘애국 시민’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말을 걸어왔다. 적어도 50걸음에 한 번씩은 내 손에 태극기가 쥐어졌다.
■ 태극기 쥐여주며 “젊은 사람이 기특하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여길 나왔어 그래~”
“아, 실은…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순간, 탄핵 반대 집회를 취재했던 팀원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저희 할머니께서 와보고 싶다고 하셔서 같이 왔다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이고 젊은 사람이 기특하네, 기특해.”
태극기를 든 왼손 팔목엔 세월호 기억 팔찌를 차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를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60대 남성이 불쑥 다가왔다. 경기도 하남시에서 왔다는 김아무개씨는 “세상 돌아가는 게 답답해서 (탄핵 반대 집회에) 네 번째 나왔다”고 했다. “우리 50년대 세대는 박 대통령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세대야. 요즘 언론이나 특검, 헌법재판소가 하는 걸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우리 대통령님 얼마나 힘드실까. 우리가 지켜야 해.” 그러면서 30분 넘도록 당신이 살아온 격동의 세월을 나열했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하려던 시민들이 대한문 인근을 지날 때는 승강이가 벌어졌다. 휴대폰으로 급히 현장을 촬영하자 한 중년 남성이 여러 번 팔을 내려쳤다. “왜 때리냐”고 따지자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온몸에 각인된 어르신들은 금세 얼굴을 붉히며 욕을 시작했다. “×××야, 사진 찍지 마. 찍지 마. 젊은 놈들이 이런 걸 쓸데없이 막 찍어 올려서 문제야” “이 ××들, 너희들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이 빨갱이 ××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경찰이 제지에 나섰다.
발언자들의 발언이 끝나면, 애국가와 ‘아! 대한민국’ ‘멸공의 횃불’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참가자들의 머리 위로 태극기는 관성적으로 흔들렸고, 표정은 점점 지쳐 보였다.
조금 멀리에서 “(국회의) 탄핵은 사기다”라는 박 대통령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발언자들의 경고 수위는 높아졌다. 정광용 탄기국 공동대표는 헌법재판소를 향해 “헌재에 악마의 재판관이 3명 있다. 이들 때문에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면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 것이다. 참극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과 강일원 탄핵심판 주심을 두고 “헌정 전체를 탄핵하려 한다. (우리는) 당신들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공언했다.
김진태·조원진·윤상현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발언 끝엔 애국가를 비롯해 ‘아! 대한민국’ ‘멸공의 횃불’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참가자들의 머리 위로 태극기는 관성적으로 흔들렸고, 표정은 점점 지쳐 보였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와 덕수궁 앞에서 열리는 탄핵 반대집회 사이 300m쯤은 경찰차벽으로 가로막혔다.
■ ‘300m’를 좁힐 ‘좋은 어른’은 어디에
경기도 광주시에서 온 60대 여성 송아무개씨와 대화를 나누다 조선일보사 건물 인근까지 함께 걸었다. 송씨는 “태극기도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도 모두 한국이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시민들이다”라면서도 “박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면 대한한국은 6·25 전쟁 때처럼 갈라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탄핵을 막아야 한다”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송씨의 근심 뒤로 경찰차벽이 보였다.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와 덕수궁 앞에서 열리는 탄핵 반대 집회 사이 300m 공간은 경찰차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 빈 공간을 두고 일부에선 ‘비무장지대’라고 불렀다. 이를 봉합할 ‘좋은 어른’은 우리 사회에 있는가. 300m는 좁혀질 수 있을까.
박수진 기자
jjinp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