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문화예술계 인사 및 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배제하기 위한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공무상 직권 남용)로 기소된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의 재판에서 김기춘 전 실장 쪽이 “직권남용은 특검 쪽이 했다”며 강한 역공을 펼쳤다.
2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 심리로 열린 블랙리스트 관련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김 전 실장 변호인인 정동욱 변호사는 “특검은 특검법상 수사대상도 아닌 사람을 수사해서 구속까지 시켰다. 구속되어 법정에 있을 사람은 김기춘 실장이 아니고 직권 남용도 특검 쪽에서 했다”고 주장했다.
재판에 참석한 김 전 실장 쪽 변호인들은 작정한 듯 번갈아가며 특검의 공소장 내용을 일일이 반박하며 20여분 이상을 보냈다.
김 전 실장 쪽 김경종 변호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문화 정책이 범죄가 될 수 없다. 이전 정부에서 진행된 편향적 문화계 지원을 바로잡는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 직권남용이 될 수 없다. 특검이 오히려 정치적 시각으로 직권남용을 한 수사다”고 주장했다.
이어 또다른 김 전 실장 쪽 이상원 변호사는 “김 전 실장은 최순실과 만난 적도 전화 통화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같이 직권남용 범죄를 공모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또 ‘반정부 성향 단체들이 좌파의 온상이 되어 종북세력을 지원하는 실태를 전수조사하여 조처하라’는 김 전 실장의 업무지시가 왜 위법한 것인지 특검은 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에서 마이클 무어(공화당에 비판적인 영화감독)가 트럼프 정부에 예산 신청했는데 트럼프가 ‘정부 정책 방향과 맞지 않은 사람에게 기금을 줄 수 없다’고 해도 위법이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김 전 실장 쪽의 이러한 주장은 정부의 일반 정책 결정과 관련해 책임자가 기소된 전례가 없다는 점을 부각해 특검 수사가 무리하게 진행됐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또 공무상 직권 남용죄가 법리적으로 구성되려면 요건이 매우 까다롭고 범죄 행위자가 스스로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권한을 남용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했는데 긴 전 실장의 국무회의 발언 등은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게 아니란 점을 재판부에 강조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김 전 실장 변호인들은 또 김 전 실장이 건강이 좋지 않고 형사소송법상 만 70세 이상은 형집행정지 사유에 해당한다며 재판부에 이점을 참작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반면, 조 전 장관 쪽 변호인은 “블랙리스트 작성 등이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전직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직전 문체부 장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과오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헌법과 역사 앞에 반성한다”고 밝혔다. 다만 그러면서도 “블랙리스트 작성 등 전체 기획·결정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날 재판에 출석한 특별검사들은 김 전 실장 쪽 변호인들 주장에 특별한 반박은 하지 않았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이날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공판준비 절차는 정식 공판과 달리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할 의무는 없다.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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