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안규홍 의병장’ 추모사업 증손자 안병진씨
담산 안규홍 의병장의 증손자인 안병진씨가 지난 4일 전남 보성 득량면 예당리 ‘파청승첩비’ 앞에서 <담산일기> 증보판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08~10년 ‘3대대첩’ 거두고 사형
보성군, 활약기록 ‘담산실기’ 증보판 “통감부도 ‘거괴’ 경계할정도 용맹”
지난해 순국 106돌 처음 추모행사
“문중·학계·지역 뜻모아 선양했으면” 파청승첩비가 선 곳은 안 의병장이 거병해 처음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곳이다. 1908년 2월 비둘기 고개라고 불리던 이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 일본군 2개 부대를 괴멸시켰다. ‘담산실기’는 54년 안 의병장의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장군과 그의 부장·참모 등의 이야기를 한문으로 기록한 책이다. 23년 대구에서 장군의 유해를 반장해 올 무렵 쓴 전기 등 기록과 해방 이후 집필한 순의(殉義)사실, 묘표, 승첩비 내용과 참모들의 행적이 2권에 걸쳐 실려 있다. 공동 번역자 김은수 광주대 명예교수와 안동교 조선대 한국고전번역센터 책임연구원(조선대 연구교수)은 “안규홍 장군 후손이 쓴 편지 등 원고 6편을 추가했고 한글세대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썼다”고 서문에 밝혔다. 담산은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태어나 10살 무렵부터 머슴살이를 하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체구는 작았지만 의협심이 남달랐고, 강직했다. 정유재란 때 의병장 문강공 안방준(1579~1654년)의 10대손이다. 그는 1907년 군대해산으로 망해가는 나라의 처지에 분노해 농민들을 규합했다. 척사파 유생 의병장의 부대와 달리 농민·포수 등이 중심이 된 평민 의병부대였다. 그래서인지 거병 초기 일부 유생들은 “함께 일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해” 거절했다. 이에 담산은 1907년 12월 그는 포수 출신인 강성인의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강성인 부대는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민폐가 심했다. ‘담산실기’엔 그가 강성인을 처단해 이듬해 2월 보성 문덕면 동소산 아래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됐다고 전한다. 담산 부대는 1908~09년 1년 6개월 남짓 동안 보성·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 중동부 지역에서 26회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첫 승리인 파청대첩을 비롯, 1908년 8월의 진산대첩, 1909년 3월 원봉대첩을 이 부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안 의병장은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거미줄처럼 포위망을 좁혀오자 훗날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했다. 하지만 그는 보성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밀고로 체포됐다. “그때 보성지서에서 큰증조부님께 ‘손도장을 찍으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했데요. 그런데 담산께서 ‘뭣이 잘못한 게 있다고 손도장을 찍어요?’라며 역정을 냈다고 하더라구요.”
머슴(담살이) 출신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안규홍(뒷줄 오른쪽 다섯째) 대장을 비롯 1910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한 의병장들의 마지막 모습. 사진 보성군청 제공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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