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사전>에 수록된 민족대표 33인 회의 장면. 인터넷 갈무리
한국사 ‘스타 강사’ 설민석씨가 ‘민족대표 33인’ 폄훼 발언에 대해 해명했지만, 누리꾼들의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논란은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이 “설씨가 조상을 폄훼했다”며 그를 찾아가 항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열됐다. 설씨가 자신의 강의에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고급 요리집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을 두고 독립선언을 ‘룸살롱 술판’으로,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셋째 부인이었던 주옥경을 술집 마담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월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 연락해 투옥됐다. 태화관이 친일파 이완용의 별장으로 사용됐던 곳이라는 점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설씨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역사학자들이 “강의 내용 일부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전하는 등 “설씨의 표현이 지나쳤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설씨는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그 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만세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계의 평가가 있고, 민족대표에 대한 비판적 견해 역시 존재한다. 학계의 비판적 견해를 수용했고, 그 사건에 대한 견해일 뿐이다.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수많은 학생들의 노력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 모를 대중들의 숭고한 죽음을 알리고 싶었다”며 “의도와 다르게 유족 분들께 상처가 될 만한 지나친 표현이 있었다는 꾸지람은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이런 공개 사과 이후 ‘민족대표 33인의 행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누리꾼들의 토론이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 기사 댓글 등을 보면 “설 강사의 표현이 잘못됐지만,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3·1운동은 일반인들의 희생 위에서 진행됐다. 그들의 외침이 임시정부의 탄생을 이끌었고 무장투쟁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민족대표라는 표현이 잘못됐다”(app*****) “민족대표 33인이 따뜻한 곳에 앉아서 독립선언서만 읽고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던 현장에 없었던 것은 사실 아니냐”(toro*****)고 비판하는가 하면,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 비유해 “촛불혁명은 시민이 만든 것이지 특정 정치인이 만든 것이 아니듯, 역사의 주인은 당시 국민이다”(yita*****) 등의 반응도 있다.
“독립운동의 다양한 수단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변절자가 소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당시 사회 지도자들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최선을 다 한 것이라고 본다”(5000*****) 등의 주장이다.
토론이 가열되다 보니, 일부 누리꾼들이 ‘가짜 정보’를 퍼뜨리는 등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주로 “민족대표 33인이 결국 친일파로 변절했다” 등의 내용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33명 중 3명(최린·정춘수·박희도)만이 친일파로 변절해 광복 뒤 반민특위 법정에 섰으며, 나머지 30명의 민족대표들은 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유덕관 기자
ydk@hani.co.kr
설민석 강사가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에 대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