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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5만 발달장애 유권자 “우리도 ‘쉬운’ 투표 하고 싶어요”

등록 2017-05-07 17:06수정 2017-05-07 22:10

대선 사전투표 동행해보니
내용 어렵거나 식별 힘들어 고충

아빠와 사전투표 참여 박하은씨
주민증 준비부터 힘든 투표일정
“공약집 읽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발달장애 유권자인 박하은씨가 지난 5일 서울 도봉구 쌍문3동 주민센터를 찾아 사전투표를 하고 ‘인증샷’을 찍고 있다. 고한솔 기자
발달장애 유권자인 박하은씨가 지난 5일 서울 도봉구 쌍문3동 주민센터를 찾아 사전투표를 하고 ‘인증샷’을 찍고 있다. 고한솔 기자
“이번 대통령선거에 나온 사람은 총 13명이에요. 누굴 뽑아야 할까요?”

사회복지사의 질문이 끝나자 발달장애인 청년 유권자 4명의 눈길이 책상 위를 향했다. 책상 위에는 평소 공작시간에 이용하는 알록달록한 색종이 대신,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들의 공보물이 펼쳐졌다. 심각한 표정으로 공보물을 살펴보던 손영재(26)씨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사진을 가리키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사람은) 아이들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좋아요.”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사진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것도 좋아요.”

■ “공보물? 읽는 데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요”

지난 4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자리한 발달장애인 지원 마을기업 ‘함께웃는가게’ 교육실에 발달장애 유권자 4명이 모였다. 자립생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린 선거 교육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투표를 앞둔 청년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공보물을 꼼꼼히 살폈다. “누구를 뽑을지 고민되는 사람 있나요?” 복지사의 말에 박하은(23)씨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조원진 새누리당 후보의 공보물을 양손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심상정 후보는) 아빠가 좋아해요. (조원진 후보는) 곰돌이 캐릭터가 예뻐서 좋아요.” 박씨는 약간은 어눌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공약, 사람(후보자)이 너무 많아요. 읽는 데 너무 힘들었고 어려웠어요”라고 말했다.

같은 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지지자인 장애인시설 책임자가 지적장애인 10여명을 상대로 사전투표 연습을 시킨 의혹 등이 제기돼 경찰이 내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경찰은 이 시설 기관장이 실제 정당과 후보자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로 지적장애인들에게 기호 2번을 찍는 연습을 시키고, 승합차로 이들을 사전투표장에 데려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권 행사를 막는 건 이런 불법동원만이 아니다. 이들의 눈높이로 이해하기 힘든 공보물도 이들의 투표할 권리를 막는 장벽이다.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로 나뉘는 발달장애는 전국적으로 약 21만명인데, 73%인 15만3000여명이 투표권이 있는 성인 발달장애인이다.

■ 이름·숫자만 빼곡한 투표용지…조력인 없는 투표소 “주민등록증 주시겠어요?” 5일 사전투표소가 설치된 서울 도봉구 쌍문3동 주민센터. 투표사무원의 안내에 박하은씨가 지갑을 뒤적였다. 옆에 선 아버지 박인용(49)씨가 하은씨에게 말했다. “응, 거기 주민등록증 꺼내면 돼.” 박씨의 말에 하은씨가 주섬주섬 주민등록증을 찾아 사무원에게 건넸다.

박씨는 이날 부모와 함께 19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에 참여했다. 투표용지를 받아든 하은씨가 차례를 기다리다 빈 기표소에 들어갔다. 박인용씨는 하은씨가 기표소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옆 기표소로 들어갔다. 마음에 담아둔 후보자 이름과 기호 번호를 알아간 하은씨는 도장이 기표란을 벗어나지 않도록 애썼다. “(도장) 정확하게 찍었어?” 아버지의 물음에, 투표소를 나서는 하은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다수 발달장애인의 경우, 기호와 이름이 쓰인 투표용지만으로 후보자를 식별하기 힘들어한다. 숫자와 글자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기표란이 작으면 도장이 엉뚱한 곳을 향할 가능성도 높다. 장애인 인권단체들이 ‘후보자의 얼굴이 들어가는 등 후보자를 판별할 시각적인 단서가 들어간 장애인용 투표용지를 제작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유다. 하은씨 어머니 김인숙(49)씨는 “대부분의 발달장애인들은 글자를 통해 사람을 식별하는 게 쉽지 않다. 기표란과 이름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칸과 이름을 연결해 원하는 후보에 도장을 찍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발달장애인의 부모가 투표에 동행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동행할 수 없는 경우에 대비해 투표소에 ‘공적 조력인을 배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앙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 권오형 센터장은 “공적 조력인이 배치되면 발달장애인이 정확하게 기표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 유권자인 박하은씨가 지난 5일 아버지 박인용씨와 함께 서울 도봉구 쌍문3동 주민센터를 찾아 사전투표를 하고 ‘인증샷’을 찍고 있다. 사진 고한솔 기자
발달장애 유권자인 박하은씨가 지난 5일 아버지 박인용씨와 함께 서울 도봉구 쌍문3동 주민센터를 찾아 사전투표를 하고 ‘인증샷’을 찍고 있다. 사진 고한솔 기자

■ 발달장애인 권리찾기, 입법 활동이 필요하다

지난 3월29일 발달장애인 당사자 단체인 ‘한국피플퍼스트’는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활동가들은 이 자리에서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알기 쉬운 공보물 제작 △(후보자들의 얼굴이 포함된) 그림 투표용지 제공 △투표소에 공적 조력인 배치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 요구에 대해 ‘공직선거법 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견해만 밝힌 상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공보물은 공직선거법 제65조 4항에 규정되어 있지만, 이 외의 장애인들을 위한 공보물 규정은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투표용지의 칸 크기나 너비 역시 하나의 규격으로 정해져 있다. 한국피플퍼스트의 김수원 활동가는 “발달장애인들이 유권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싶어도, 후보자의 이름이나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면 제대로 투표조차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발달장애인들도 쉽게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금비 고한솔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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