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40여년 만에 재회한 ‘유럽간첩단 사건’ 피해자와 변호인

등록 2017-07-07 17:39수정 2017-07-07 18:04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열린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열린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모두가 야만의 시대를 참 어렵게 견뎌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승헌 변호사(83)와 김판수(75)씨가 40여 년 만에 마주 앉았다.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음식점에서 사회 원로들이 모여 한승헌 변호사의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자리. 억울한 옥살이로 고초를 겪었던 20대 청년과 그를 변호한 30대 인권 변호사는 어느새 흰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됐다.

두 사람은 48년 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한 법정에 섰다. 유럽 간첩단 사건은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으로 꼽힌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서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독일 동베를린을 찾은 학자 등 20여명에게 북한 공작원과 연계해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를 씌웠다. 이 사건으로 김규남 민주공화당 의원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박노수 교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박 교수의 권유로 동베를린을 다녀온 김판수씨도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한 변호사는 김씨의 변호를 맡아 대법원 판결까지 1년 2개월 동안 곁을 지켰다. “기댈 사람이 전혀 없었을 때 한 변호사님이 제 손을 잡아주셨죠.” 김씨가 말했다. 한 변호사는 “그때 변호인으로서 이 사람이 무죄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이 판결은 유죄가 날 것 같다는 모순된 심정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사건으로 김규남 전 의원과 박노수 교수는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김씨는 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김씨는 당시 한 변호사가 던진 질문을 선명히 기억한다. 1969년 5월 한 변호사가 옥에 갇혀있는 김씨를 찾아왔다. 한 변호사는 재판에 필요한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까.” 김씨는 “제 생각과 믿음을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변호사님을 보면서,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 한다’는 생각에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주눅 들어 법정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면 안 되니 힘을 실어줬다. 그것대로 변호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마련된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마련된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승헌 변호사도 옥살이를 했다. 검찰은 1972년 한 변호사가 <여성동아>에 ‘어떤 조사’라는 수필을 문제 삼았다. “당신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앞날의 ‘미확정 사형수’를 위한 인간의 절규를 높이는 결의”라 표현한 것을 두고 검찰은 수필 속 ‘당신’이 사형당한 김 전 의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 변호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두 사건이 ‘유죄의 멍에’를 벗은 건 40여년이 흐른 후다. 2015년 대법원은 ‘유럽 간첩단 사건’ 사형 집행 4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6월 한 변호사도 ‘어떤 조사’ 필화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 변호사의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야만의 시대’를 통과해온 동지가 됐다.

한승헌 변호사는 말한다. “제가 무죄 판결을 받고 나서 ‘늦게 온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처럼 유죄의 멍에를 쓴 사람들이 늦어도 좋으니까 무죄 판결을 받고 역사의 당당한 일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런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한 변호사의 말을 듣고 있던 김판수씨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