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열린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모두가 야만의 시대를 참 어렵게 견뎌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승헌 변호사(83)와 김판수(75)씨가 40여 년 만에 마주 앉았다.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음식점에서 사회 원로들이 모여 한승헌 변호사의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자리. 억울한 옥살이로 고초를 겪었던 20대 청년과 그를 변호한 30대 인권 변호사는 어느새 흰머리 희끗희끗한 노인이 됐다.
두 사람은 48년 전 ‘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과 변호인으로 한 법정에 섰다. 유럽 간첩단 사건은 동백림 사건, 인혁당 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으로 꼽힌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서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독일 동베를린을 찾은 학자 등 20여명에게 북한 공작원과 연계해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를 씌웠다. 이 사건으로 김규남 민주공화당 의원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박노수 교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박 교수의 권유로 동베를린을 다녀온 김판수씨도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한 변호사는 김씨의 변호를 맡아 대법원 판결까지 1년 2개월 동안 곁을 지켰다. “기댈 사람이 전혀 없었을 때 한 변호사님이 제 손을 잡아주셨죠.” 김씨가 말했다. 한 변호사는 “그때 변호인으로서 이 사람이 무죄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이 판결은 유죄가 날 것 같다는 모순된 심정을 갖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사건으로 김규남 전 의원과 박노수 교수는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김씨는 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김씨는 당시 한 변호사가 던진 질문을 선명히 기억한다. 1969년 5월 한 변호사가 옥에 갇혀있는 김씨를 찾아왔다. 한 변호사는 재판에 필요한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까.” 김씨는 “제 생각과 믿음을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변호사님을 보면서,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려 한다’는 생각에 위로받았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주눅 들어 법정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면 안 되니 힘을 실어줬다. 그것대로 변호의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식당에 마련된 한승헌 변호사 무죄 판결 축하 자리에서 만난 김판수씨(왼쪽)와 한승헌 변호사.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승헌 변호사도 옥살이를 했다. 검찰은 1972년 한 변호사가 <여성동아>에 ‘어떤 조사’라는 수필을 문제 삼았다. “당신의 죽음을 아파하는 것은 앞날의 ‘미확정 사형수’를 위한 인간의 절규를 높이는 결의”라 표현한 것을 두고 검찰은 수필 속 ‘당신’이 사형당한 김 전 의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 변호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두 사건이 ‘유죄의 멍에’를 벗은 건 40여년이 흐른 후다. 2015년 대법원은 ‘유럽 간첩단 사건’ 사형 집행 4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6월 한 변호사도 ‘어떤 조사’ 필화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 변호사의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야만의 시대’를 통과해온 동지가 됐다.
한승헌 변호사는 말한다. “제가 무죄 판결을 받고 나서 ‘늦게 온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우리처럼 유죄의 멍에를 쓴 사람들이 늦어도 좋으니까 무죄 판결을 받고 역사의 당당한 일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런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많다고 봅니다.” 한 변호사의 말을 듣고 있던 김판수씨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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