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야만의 시대를 참 어렵게 견뎌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승헌 변호사(83)와 김판수(75)씨가 40여년만에 마주 앉았다.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음식점에서다. 최근 한 변호사의 반공법 무죄 판결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48년 전 ‘유럽 간첩단 사건’ 법정에 변호인과 피고인으로 섰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유럽 유학 중 독일 동베를린을 찾은 학자 등 20여명에게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를 씌웠다. 이 사건으로 김규남 당시 민주공화당 의원과 박노수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김씨는 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한 변호사도 이 사건과 관련돼 9개월 옥살이를 했다. 한 변호사가 쓴 ‘어떤 조사’라는 수필에서 ‘당신’이라는 표현이 사형 당한 김 전 의원을 지목한다며 박정희 정권이 반공법 위반 혐의를 덧씌웠다.
2015년 대법원은 ‘유럽 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6월 한 변호사도 ‘어떤 조사’ 필화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날 축하 자리에서야 재회한 두 사람은 ‘야만의 시대’를 통과해온 동지가 돼 있었다.
김씨는 “당시 한 변호사가 감옥으로 찾아와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후회합니까’라고 물었다”고 돌이켰다. “제 생각과 믿음을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 하는구나’ 싶어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 변호사는 “주눅 들려서 소신을 굽히면 안되니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했다.
“우리처럼 멍에를 쓴 사람들이 이제라도 무죄판결을 받고 역사의 당당한 일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아직 우리는 할 일이 많아요.” 한 변호사의 말에, 김씨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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