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이아무개(25)씨는 지난 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으로 향했다. 연예인 박유천씨를 성폭행 혐의로 ‘허위 고소’했다는 혐의로 재판정에 선 송아무개(24)씨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이씨는 오전 9시께 법정에 들어선 뒤 막차가 끊길 때까지 방청석을 지켰다. 그는 “송씨가 범죄자라는 혐의를 받고 15시간 가까이 재판에 홀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뒤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날 재판정에는 기자도, 박씨의 팬도 아닌 여성 50~60명이 북적였다. 피고인과 일면식도 없지만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피켓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는 대신, 이들은 변호인 변론을 메모하거나 검사의 발언에 한숨을 쉬며 방청석을 지켰다.
성폭력 범죄에 연루된 여성들에게 힘을 주겠다는 의미로 관련 재판을 방청하는 ‘방청 서포터즈’ 활동이 새로운 여성 운동 방식으로 퍼지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사생활을 캐묻는 등 인권침해가 벌어지지 않는지, 합당한 재판 결과가 나오는지 등을 감시하고, 법정에서 성폭력 당시를 떠올려야 하는 피해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자는 취지다.
여성단체에서 시작한 이런 연대 방식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 확산됐다. 누군가 트위터·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성폭력 관련 재판 일정을 알리면, 혼자 혹은 여럿이 재판을 방청한 뒤 흩어지는 식이다.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탁아무개(33)씨는 지난해부터 출판·문학계 성폭력 사건 재판을 방청해왔다. 트위터를 통해 한 디자인 회사에서 일어난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을 알게 됐고, 올해까지 대여섯 차례 관련 재판에 참석하면서 본인의 트위터 계정에 재판 일정을 올리고 방청에 참여할 사람을 모았다. 재판 일정을 공유한 트위트가 5000회 이상 공유됐을 땐 방청석 60여석이 가득 차기도 했다. 탁씨는 “방청석을 보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개개인들이 ‘피해자에게 힘을 주자’는 생각으로 모였다가 인사도 없이 흩어졌다. 트위터를 통해 공유되는 후일담을 통해 어떤 분들이 다녀갔는지 짐작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영화학을 공부하는 최아무개(24)씨도 지난달 한 남자 배우가 영화 촬영 중 상대 여성 배우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항소심 재판을 방청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재판 일정을 접한 최씨는 “영화계에도 성폭력이 많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라서 재판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다. 이번 사건은 한 사람만의 사건이 아니다. 재판부에 ‘영화계에 만연한 성폭력에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참석했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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