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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너, 방송 체질이었니? 연기였던 거야?

등록 2017-08-25 19:49수정 2017-08-27 14:49

걱정했던 조카와의 라디오 녹음은 너무 수월하게 끝났다. 그게 다 연기였을까.
걱정했던 조카와의 라디오 녹음은 너무 수월하게 끝났다. 그게 다 연기였을까.
[토요판] 남지은의 조카덕후감

9. 라디오 다큐 ‘찍던’ 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조카와 다큐멘터리를 찍는 날.(‘조카덕후감’을 읽은 <시비에스>(CBS) 라디오에서 조카와 고모의 이야기를 라디오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었다) 사전 취재 등 담당 피디와 조율 끝에 결전의 날을 잡았다. 마냥 설레던 마음이 ‘디데이’가 되자, 천근만근 근심으로 변했다.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아이를 취재하는 일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꼴이라는 걸.

아무리 사랑하는 조카라지만, 여섯살 아이일 뿐. 녹음이 뭔지, 취재가 뭔지도 모르는 애가 일정대로 따라줄 리 만무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별일 없을 거예요.” “애가 순해서 잘 놀 거예요.” 피디를 안심시켰지만, 내심 불안했다. ‘잠 온다고 징징대다가 덜컥 자면 어떡하지.’ ‘하기 싫다고 울면 어떡하지.’ 아니 그것보다 이 걱정이 가장 컸다. ‘갑자기 고모를 낯설어하면 어떡하지.’(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아이들은 몇주만 못 봐도 ‘누구세요’ 한다더라. 흠흠) 아들의 출연 소식에 들뜬 동생 부부가 고모를 만나면 “고모 사랑해요”라고 푹 안길 것을 ‘연습’시켰다는데, 어디 애들이 마음처럼 움직이나.

그런데 기우였다. 어머, 이 아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모를 사랑하는 걸까. 유치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는 고모를 보더니 “고모~” 하며 쪼르르 달려와서 폭 안겼다. 그래 고모야 고모, 대현아 너무 보고 싶었어. “고모 왜 이제 왔어요”라는 말이 연거푸 나왔다. 평소보다 더 반가워했고, 평소보다 더 푹 안겼다. 연습의 효과인가. 에이 설마.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조카는 “고모 어디가 좋냐”는 피디의 질문에 “고모 볼이 사랑스러워요” “고모랑 같이 살고 싶어요”라는 대답을 술술 내뱉었다. 마이크를 어색해하지도 않고, 낯선 피디의 등장에도 거부감 없이 평소처럼 잘 놀았다.

조카의 고모 사랑은 집에서 더 폭발했다. 다큐멘터리 출연 선물로 약속했던 레고를 사주고 평소처럼 놀아달라는 주문에 동생네 집에 갔다. 조카가 좋아하는 쌀보리 게임을 하고 화상통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밥을 먹고 이 모든 것이 막힘없이 진행됐다. 조카는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모든 요구에 응했다. “고모와 쌀보리 하자”고 하면 얼른 두 손을 모았고, 친구와의 화상통화에 “고모 친구 어디세요” “뭐 하세요”라고 질문도 잘했다. 조카가 피곤해하지도 않고 잠도 안 자고 잘 논 덕분에 녹음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집에 가려는 고모를 붙잡고 “고모 가지 마요”라고 아쉬워까지 하다니.

감동해서 눈물이 핑 돌려던 찰나 피디의 말에 간이 철렁했다. “이렇게 수월하게 진행되다니 대현이 정말 방송 체질인가 봐요.” 아, 그러고 보니 애가 말에 영혼이 좀 없기는 했다. 심지어 ‘쌀보리’ 게임을 하며 “대현아 좀 더 크게 웃어보라”고 하니 갑자기 “깔깔깔” 소리 내 배꼽 잡고 웃기도 했다. 설마 넌 그저 오늘 촬영에 최선을 다한 거니? 정말 넌 방송 체질이었던 거니? 고모 좋아서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거 다 연기였니? 눈물이 핑 돌려던 찰나 올케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대현이 고모 갔다고 지금 ‘나는 이제 어떻게 사냐’며 울고불고 난리예요. 언니, 대현이랑 통화 좀 해보세요.” 그래, 대현아 너의 마음은 진심이었어.

조카와 고모의 평범하지만 행복했던 하루는 새롭게 선보이는 <시비에스> 특별기획 <400초 음향다큐-우리들>에서 11월 중에 내보낸다. 다양한 사연을 7분에 담은 다큐멘터리 총 20편 중 한편이다. 모처럼 맑은 날, 조카와 오래오래 기억될 특별한 하루를 선물받았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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