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두 발 잃은 지체장애인 화가 윤용주씨
30일 오후 3시 서울 홍익대 현대미술관(HOMA)에서 ‘2017 제2회 국제장애인미술대전’ 시상식이 열린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하고 국제장애인미술교류 조직위원회가 주관하는 국제공모전이니만큼 중국, 일본 등 6개 나라 작가들이 600여점을 응모했다. 서양화, 문인화, 서예, 공예, 한국화 등의 분야에서 182점이 선정됐는데 특별한 이력의 수상자가 있다. 한국화 특선에 입상한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서 사는 지체장애인 화가 윤용주(54)씨다.
직장에 다니면서 수년째 동자동 쪽방촌에서 기록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가 김원씨가 윤씨의 남다른 사연을 <한겨레>에 보내왔다.
30대초까지 상업화 그리던 직업화가
중장비사업 하다 외환위기 맞아 부도
이혼·가족해체·술·당뇨로 두다리 절단
“지금도 기초수급비 받아 빚 갚는 중” 동자동 쪽방촌 이웃들 도움으로 응모
오늘 ‘국제장애인미술대전’ 특선 수상 윤용주씨는 두 발 없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2년 전 오른쪽 발을 절단했고 지난 4월 왼쪽 발마저 절단했다. 신장 질환, 천식, 뇌전증, 폐기종도 앓고 있다. 50년도 넘은 낡은 건물 반지하 복도 끝에 해가 들지 않는 작은 쪽방이 그가 사는 곳이다. 그는 가족과 생이별하고 혼자 산다. 정부에서 지급되는 기초생활수급비가 그의 수입의 전부다. 어엿한 사업가였던 그를 쪽방으로 내몬 것은 무엇일까? 그는 30대 초까지 한국화를 그리는 직업화가였다. 전북 전주에서 상업적인 그림도 그렸다.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병풍도 만들어 팔았다. 중학교 때부터 익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다. 주문이 급격히 줄어들자 그는 잠시 그림을 접고 돈을 벌기 위해 중장비 기술을 배워 현장 기사로 일했다. 그런데 중장비를 구입하여 직접 사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때 어음으로 받은 대금이 부도처리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집·재산·중장비를 모두 날리고 빚만 떠안게 되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가정불화가 생겨 결국 이혼에 이르고 어린 두 자녀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홀로 고시원과 쪽방을 전전하며 술로 지내다가 온갖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두 발을 잘라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하여 살아온 것이 지난 십수년이다. 그는 지금도 부도처리한 건설회사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다. 고의로 부도처리한 그들은 살아남았고, 부도를 맞은 그는 지금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기초생활비에서 지금도 월 5만8천원씩 빚을 갚고 있다. 그가 이제 웃는다. 웃을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덕분이지요.” 술도 끊었다. 두 발 절단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더 힘을 얻게 되었다. 15년 동안 복용하던 수면제를 중단한 것도 불과 3개월 전이다. “이제 심적으로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힘을 내자, 힘을 내자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몇 달 전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화를 그릴 수 있는 화구를 선물했다. 하지만 좁은 쪽방에서 불편한 몸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 환상통을 잊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야 하는 그가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옛 기억을 더듬어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꺾였던 붓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좁은 쪽방에 전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신비할 정도였다. 이제는 불평불만도 없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너무 고맙고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요.” 이틀에 한번씩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왕복 3시간 걸리는 병원을 다니면서도 불평이 없다. 모든 것이 고맙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힘든 일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요. 통증도 잊게 되고,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주위 사람들과 얘기도 더 많이 해요.” 이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겼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회복이 되었으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귀중한 존재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발을 잃고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작품씩 그림을 그린다. 꼬박 밤을 새우기도 한다. 처음 공모전 응모를 권하자 그는 꺼렸다. 일단 자신감이 없었다. 20년 가까이 중단했던 그림을 다시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도 문제였다. 최근의 작품 경향을 알 수도 없었다. 스케치를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고심 끝에 응모작을 제출했고, 1차 심사와 최종심사를 통과하여 특선에 뽑혔다. 그가 말했다. “너무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이야기 들어주고 공감해주어서 고맙고, 다시 그림 그릴 생각이 들게 해주어서 고맙죠.” “이렇게 회복되시니 제가 얼마나 고마운데요.”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사람들은 쪽방촌을 이상하게 봐요. 비참한 곳, 더러운 곳, 불쌍한 곳,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봐요.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봐요.” “정부는 보이지 않는 벽 속에 가두어 둔 채 죽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돈만 지원해주고, 조용히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언론도 쪽방촌 사람들을 이용해요. 쪽방촌에 대한 이해보다는 쪽방촌의 어두운 면을 일회성 기삿거리로 이용해요.” 쪽방촌에는 쌀도 오고, 반찬도 오고, 빵도 오고, 옷도 온다. 회사도 오고, 기관도 오고, 교회도 오고, 정부도 온다. 목사도 오고, 복지사도 오고, 봉사자도 온다. 그런데 사람은 안 온다. “언론에 나가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쪽방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에게 소망이 있다. 공동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두운 복도를 기어서 계단을 올라야 하고, 물을 뜨기 위해 복도를 기어 공동세면장으로 가야 하는 쪽방을 벗어나 임대주택으로 가는 것이다. 맘껏 그림 그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더 큰 소망이 있다.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헤어진 아내, 그리고 성장한 아들과 딸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요.” 그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다. 글·사진 김원/사진가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반지하 구석의 단칸방에서 지체장애인 화가 윤용주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김원 사진가
중장비사업 하다 외환위기 맞아 부도
이혼·가족해체·술·당뇨로 두다리 절단
“지금도 기초수급비 받아 빚 갚는 중” 동자동 쪽방촌 이웃들 도움으로 응모
오늘 ‘국제장애인미술대전’ 특선 수상 윤용주씨는 두 발 없는 1급 지체장애인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2년 전 오른쪽 발을 절단했고 지난 4월 왼쪽 발마저 절단했다. 신장 질환, 천식, 뇌전증, 폐기종도 앓고 있다. 50년도 넘은 낡은 건물 반지하 복도 끝에 해가 들지 않는 작은 쪽방이 그가 사는 곳이다. 그는 가족과 생이별하고 혼자 산다. 정부에서 지급되는 기초생활수급비가 그의 수입의 전부다. 어엿한 사업가였던 그를 쪽방으로 내몬 것은 무엇일까? 그는 30대 초까지 한국화를 그리는 직업화가였다. 전북 전주에서 상업적인 그림도 그렸다.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병풍도 만들어 팔았다. 중학교 때부터 익힌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다. 주문이 급격히 줄어들자 그는 잠시 그림을 접고 돈을 벌기 위해 중장비 기술을 배워 현장 기사로 일했다. 그런데 중장비를 구입하여 직접 사업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때 어음으로 받은 대금이 부도처리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집·재산·중장비를 모두 날리고 빚만 떠안게 되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 가정불화가 생겨 결국 이혼에 이르고 어린 두 자녀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홀로 고시원과 쪽방을 전전하며 술로 지내다가 온갖 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두 발을 잘라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그렇게 자포자기하여 살아온 것이 지난 십수년이다. 그는 지금도 부도처리한 건설회사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다. 고의로 부도처리한 그들은 살아남았고, 부도를 맞은 그는 지금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기초생활비에서 지금도 월 5만8천원씩 빚을 갚고 있다. 그가 이제 웃는다. 웃을 수 있는 마음이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의 덕분이지요.” 술도 끊었다. 두 발 절단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더 힘을 얻게 되었다. 15년 동안 복용하던 수면제를 중단한 것도 불과 3개월 전이다. “이제 심적으로 흔들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힘을 내자, 힘을 내자라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몇 달 전 어느 날 그가 말했다.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화를 그릴 수 있는 화구를 선물했다. 하지만 좁은 쪽방에서 불편한 몸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 환상통을 잊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해야 하는 그가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옛 기억을 더듬어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꺾였던 붓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좁은 쪽방에 전지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신비할 정도였다. 이제는 불평불만도 없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너무 고맙고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요.” 이틀에 한번씩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로 왕복 3시간 걸리는 병원을 다니면서도 불평이 없다. 모든 것이 고맙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재미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힘든 일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요. 통증도 잊게 되고,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주위 사람들과 얘기도 더 많이 해요.” 이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겼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회복이 되었으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구나, 귀중한 존재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어요. 발을 잃고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작품씩 그림을 그린다. 꼬박 밤을 새우기도 한다. 처음 공모전 응모를 권하자 그는 꺼렸다. 일단 자신감이 없었다. 20년 가까이 중단했던 그림을 다시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도 문제였다. 최근의 작품 경향을 알 수도 없었다. 스케치를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고심 끝에 응모작을 제출했고, 1차 심사와 최종심사를 통과하여 특선에 뽑혔다. 그가 말했다. “너무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도와드린 것도 없는데….” “이야기 들어주고 공감해주어서 고맙고, 다시 그림 그릴 생각이 들게 해주어서 고맙죠.” “이렇게 회복되시니 제가 얼마나 고마운데요.” “아닙니다. 제가 고맙죠.” 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사람들은 쪽방촌을 이상하게 봐요. 비참한 곳, 더러운 곳, 불쌍한 곳, 가면 안 되는 곳으로 봐요.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을 게으른 사람,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봐요.” “정부는 보이지 않는 벽 속에 가두어 둔 채 죽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돈만 지원해주고, 조용히 있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언론도 쪽방촌 사람들을 이용해요. 쪽방촌에 대한 이해보다는 쪽방촌의 어두운 면을 일회성 기삿거리로 이용해요.” 쪽방촌에는 쌀도 오고, 반찬도 오고, 빵도 오고, 옷도 온다. 회사도 오고, 기관도 오고, 교회도 오고, 정부도 온다. 목사도 오고, 복지사도 오고, 봉사자도 온다. 그런데 사람은 안 온다. “언론에 나가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쪽방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에게 소망이 있다. 공동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두운 복도를 기어서 계단을 올라야 하고, 물을 뜨기 위해 복도를 기어 공동세면장으로 가야 하는 쪽방을 벗어나 임대주택으로 가는 것이다. 맘껏 그림 그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더 큰 소망이 있다. 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헤어진 아내, 그리고 성장한 아들과 딸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미안하고 미안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요.” 그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다. 글·사진 김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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