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이자 전액 요구는 가혹” 국가가 3분의 1 내도록 조정
사법부 책임 우회 인정…유족 “명예훼손 노력 법정에서 빛바래”
사법부 책임 우회 인정…유족 “명예훼손 노력 법정에서 빛바래”
한국전쟁 직전이던 1949년 12월, 국군은 ‘공비 토벌’ 목적으로 경북 문경 석달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정환(67)씨도 이때 어머니와 증조할머니 등 가족 7명을 잃었다. ‘문경 민간인 학살 사건’ 유족들은 이후 국회 청원과 헌법소원을 벌였지만 번번이 외면당하다 2007년 6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국가의 위법행위를 처음 인정받았다. 이듬해 7월 이씨 등 유족 4명은 국가에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법원의 ‘롤러코스터’ 판단과 국가의 버티기에 소송은 10여년간 이어졌다. 애초 법원은 소멸시효(5년)가 지나 이씨가 배상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2011년 9월 대법원은 “국가가 사건을 은폐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했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이씨는 4억여원을 배상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시 2014년 5월 “다른 과거사 사건보다 위자료가 많다”며 판단을 뒤집었고, 2015년 9월 이씨가 받아야 할 최종 배상금은 9310만원으로 결정됐다. 이씨는 배상금 차액 등 3억2천여만원을 국가에 반납했지만, 법정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국가가 이자가 모자란다며 소송을 냈다. 4억원을 받은 2012년 5월을 기준으로 그동안의 이자까지 물어내라는 논리였다. 1심 법원은 국가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민사1부(재판장 김상환)는 국가도 이자의 3분의 1을 부담해야 한다고 보고, 이씨가 4400만원을 물어주라고 조정결정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오랜 재판의 경과와 친모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채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 이씨 과거를 생각하면 1심 판결의 내용은 다소 가혹하다”고 판단했다. 사법부가 소멸시효와 위자료 과다 등을 이유로 과거사 사건 국가배상금을 줄여온 분위기에서, 국가가 반환금의 이자까지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판단을 내놓은 것이라 눈길을 끈다.
서울고법은 또 “이 사건은 ‘과거사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의 정립 과정에서 발생했다”며 사법부의 책임을 우회적으로 짚었다. 법원이 10여년간 시간을 끌며 판단을 번복하는 탓에 이씨는 9차례 재판을 치르며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특히 대법원은 애초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놓고 3년여 만인 2014년 ‘위자료 과다’를 이유로 판단을 재차 뒤집었다. 당시 법조계에선 “대법원이 국가배상금을 줄이기 위해 금액까지 판단하며 무리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씨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송을 주도한 채의진(사망 당시 78살)씨가 지난해 숨지고 일부 유족은 피로감에 항소를 포기해 이번 소송은 이씨 홀로 진행했다. “법정에서 국가를 이기긴 쉽지 않더군요. 어머니 산소에 가서 드릴 말씀이 없어요.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려 소송을 냈지만, 외려 법정에서 노력이 빛바랬죠.”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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