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삶의 단계마다 밟아야 할 ‘경로’를 일깨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은 “이성친구는 없니?”, “결혼은 해야지?”, “아이는 언제 낳니?” 등의 질문으로 ‘연애·취업·결혼·출산’에 이르는 전형적인 삶의 경로를 충실히 밟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른바 ‘정상 경로’를 벗어난 이들에게 명절이 고역인 이유다. 법적 결혼이 불가능해 파트너와 동거 중인 성소수자들이 대표적이다. <한겨레>는 명절에 대해 다른 경험을 갖고 있는 성소수자 네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명절’을 무시하거나, 인내하고, 또는 이겨내고 있었다.
■ “여친 없냐”, “옷이 왜 그래”…피하고 싶은 추석
“추석 단기 알바라도 찾으려고 해요. 가족행사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보려고요.” ‘무디’(20·활동명)는 지난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디는 남성 동성애자다. 명절은 그를 늘 곤혹스럽게 만든다. 화장을 좋아하지만 친척들의 시선이 걱정돼 추석 연휴 며칠 간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여자친구들과 찍은 사진으로 바꾸어 놓는다. “애인은 없냐”는 질문을 피하기 위해 조카들을 데리고 집밖을 헤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무디의 어머니는 그의 성적지향을 알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어머니는 그를 탐탁치 않아 한다. 그에게 “친척들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면 아웃팅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무디에게 추석은 ‘스트레스 지수 높은 구습’일 뿐이다.
‘일월’(23·활동명)도 추석을 피하고 싶다. 그는 평소 어른들을 만나면 “남자친구는 없니?”, “옷은 언제부터 여자처럼 입을 거니?” 등의 이야기를 듣는데, 추석 때는 연휴 내내 들어야한다. 스스로 ‘여성 동성애자’라고 깨달은 지 10년이 됐기 때문에 이제 내성이 생겼다.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러게요”하고 눙친다.
가족들은 아무도 ‘일월’이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모른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상황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밖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오히려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일월은 “집으로 들어갈 때 오히려 구두 신고 정장 입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긴 추석 연휴는 그에게 추석은 ‘구두 신고 정장을 입은 채 오래 견뎌야 하는 시간’일 뿐이다.
■ “추석 때 친척에 커밍아웃” 성전환 앞둔 성소수자
올 추석은 이한결(24)씨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예정이다. 이씨의 타고난 생물학적 성은 여성이다. 하지만 성정체성은 남성이다. 그는 오는 10월 남성으로 성전환수술을 받는다. 10월과 내년 1월 두 차례에 거쳐 수술을 받고 나면 남성에 가까운 외모를 갖게 된다. 놀랄 친척들을 생각해 올 추석 때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하기로 결심했다.
이씨는 추석 때마다 친척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여자가 왜 그렇게 머리가 짧냐”이다. 한때 이 말이 너무 듣기 싫어 머리를 기르기도 했다. 이씨는 “이제는 너무 자주 들어 뻔뻔해졌다”며 “‘잘생기지 않았어요?’라면서 너스레를 떠는 게 대처법”이라고 말했다. 수술이 모두 끝나는 내년이면 더는 듣지 않을 질문이다.
어머니 정은애(54)씨는 커밍아웃을 준비 중인 이씨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참여하면서 이씨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그는 “벽장 속에 갇혀 있는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한결이가 이번 추석에라도 커밍아웃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1년 전 주변인들에 커밍아웃을 한 뒤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머니는 이씨가 친척들 앞에서도 당당하길 바랐다. ‘그랬구나. 이야기 해줘서 고맙다.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앞으로 나도 알아가도록 노력할게.’ 자신이 그랬듯이 친척들도 한결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를. 어머니의 이번 추석 소원이다.
■ 친척도 “마음고생 심했겠다” 추석은 마음편히
지난해 추석 때 정예준(23)씨의 어머니 비비안(48·활동명)은 6남매 친정식구들에게 정씨가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말로 설명하면 두서가 없을까봐 장문의 글을 친정 식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올렸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둘째 언니를 제외하고 모두가 지지하고 응원했다.
정씨가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한 건 지난해 6월이다. 부모님은 아들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정씨를 대신해 부모님이 커밍아웃을 대신한 뒤, 정씨는 친척들의 지지도 얻게 됐다. 정씨의 이모부는 “원래 동성애자를 싫어했는데 조카 덕분에 생각이 바뀌었다. 예준이가 마음고생이 심했겠다”며 그를 걱정해주었다.
정씨는 “이제 모든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한 뒤 화려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는 등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친척들 앞에서도 본인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여자친구 없어?” 가장 큰 변화는 이번 추석부터 그에게 이렇게 물을 친척이 없다는 점이다.
고한솔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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