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곡롬곡.’ 대학생 이아무개(20)씨는 사촌 동생과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다가 의문의 메시지를 받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핸드폰 화면을 180도 돌려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롬곡롬곡’의 위아래를 뒤집어 보니 ‘눈물눈물’로 보였다. 이른바 ‘야민정음’이었다. 그 뒤 이씨도 점차 실생활에서 야민정음을 사용하게 됐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댕댕이’(멍멍이)라 부르고 좋은 노래가 있으면 ‘띵곡’(명곡)이라며 친구에게 소개한다. 이씨는 “처음엔 ‘이런 게 있구나’ 신기했는데, 어느새 나도 자연스레 야민정음을 쓰게 됐다. 모르는 단어를 보면 검색으로 뜻을 찾아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글의 자음·모음을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 바꿔 단어를 새롭게 표현하는 ‘야민정음’이 유행하고 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거나(대전→머전, 관광명물→판팡띵물), 글자 두 개를 합쳐서 한 글자로 만들거나(부부→쀼, 굴국밥→꿁밥), 방향을 뒤집어 읽는 식(폭풍→옾눞)이다. 2014년께 인터넷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야구갤러리’에서 이런 식의 언어유희가 시작됐기 때문에 ‘야구갤러리’와 ‘훈민정음’을 합성해 ‘야민정음’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야민정음은 10·20대 젊은 세대 중심으로 트위터, 카카오톡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특정 집단 안에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은어’ 역할도 한다. 박아무개(27)씨는 군대에 있을 때 “중위를 비롯해 군대 동기들이 ‘대대장’을 ‘머머장’으로 불렀다. 대대장이 부대에 방문하면 ‘야, 머머장 온다’고 소리치곤 했다”고 말했다. 최아무개(19)씨는 트위터에서 아이돌 팬덤 활동을 할 때 주로 야민정음을 사용한다. 엠넷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한 출연자를 좋아하는 최씨는 출연자 이름에 ‘빈’이 들어간다는 점을 이용해 ‘넨’이라고 바꿔서 트위터에 적는다.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일종의 ‘애칭’인 셈인데, 해당 연예인의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자신이 적은 트위트가 검색에 걸려 외부로 공개되지 않으면서도 트위터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최씨는 설명했다.
학계는 ‘야민정음’을 ‘일시적인 유행’, ‘놀이문화의 일환’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이성하 한국외대 교수(영어학)는 “야민정음은 한글만의 특이한 말놀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한 블록(음절)으로 모아 사용하는데, 자음·모음의 획들이 겹쳐지다 보니 다른 글자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한글의 독특한 조합방식을 반영한 것으로 언어를 변형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언어 놀이의 일종”이라고 분석했다. 정인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은 “문자 읽는 법 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극심해지면 우리말을 훼손할 여지도 있겠지만, 야민정음으로 언어문화 자체가 좌우될 거라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한솔 임재우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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