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업체에서 일하는 오수희(30)씨는 이번 연휴 동안 서핑을 배우러 충청남도 태안군 만리포에 다녀왔다. 좋아하는 소설인 한강의 <희랍어시간>도 다시 꺼내 읽고, 민주주의에 관한 5부작 다큐멘터리도 몰아서 봤다. 일에 쫓기는 평소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오씨는 출근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저녁 “주말이나 짧은 연휴가 다음 노동을 위한 최소한의 충전이라면 이번 추석 연휴는 내 일상을 몇 발자국 떨어져 살펴볼 수 있는 진정한 휴식이었다”며 열흘간의 연휴를 회상했다. 오씨는 “연휴가 끝나면 전과 똑같이 살아가겠지만, 중간중간 생각 정리할 시간을 갖는 건 일의 생산성과 자아실현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례 없던 열흘간의 장기 추석 연휴를 보낸 직장인 사이에서 ‘휴가다운 휴가’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장기근속휴가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황금연휴를 계기로 휴가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컸다.
서울 강남구의 금융권 3년차 직장인 권혁주(26)씨는 이번 추석 연휴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긴 휴식을 보냈다. 권씨는 “최근 번아웃 증후군(과도한 업무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도의 무기력에 빠지는 증후군)을 겪던 차에 열흘 동안 특별한 일정 없이 집에서 푹 쉴 수 있었다. 출근하면 밀린 일이 몰려들텐데 그래도 이제 여유 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추석은 장기휴가제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권씨는 “이번엔 모두 다같이 쉬는 명절이어서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긴 휴가를 쓸 수 있다면 스위스에서 트레킹(도보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역대 최장 추석 연휴 시작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오전 국외로 떠나는 시민들이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인천공항/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서울 구로구의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 이정환(28)씨는 연휴를 이용해 가족과 함께 2박 3일 울릉도 여행을 즐겼다. 이씨는 “주로 선진국은 한 달씩 휴가를 자유롭게 쓴다는데 우리나라는 휴가 사용이 너무 제한적”이라며 “모든 직장인에게 단비 같은 휴식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기근속휴가는 일정 근속연수가 쌓이면 15~30일 정도 장기휴가를 주는 제도를 말한다. 한화그룹, 씨제이(CJ)그룹, 다음카카오 등을 중심으로 한국에서도 점차 장기근속휴가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생겨나는 추세다. 직원들에게 충분한 재충전의 시간을 주고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겠다는 취지다. 호주에서는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근무한 노동자에게 통상 2~3개월의 유급 장기근속휴가를 보장한다. 프랑스는 매해 여름 5주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한 식품업체에서 근무하는 이승우(38)씨는 “이번 명절에 샌드위치 임시공휴일이 껴 긴 연휴가 만들어졌지만, 사실 명절이 아니더라도 이런 수준의 장기휴가가 정착되고 퍼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절은 본래의 의미대로 가족과의 시간으로 보내고, 여행 등의 여가를 즐길 휴가가 별도로 마련돼야 한다는 뜻이다.
최장 10일에 이르는 긴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역에서 이종국(43) 가족이 처가인 울산을 가기 위해 플랫폼으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새로운 휴가 제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연차부터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민준(35)씨는 “한국은 회사에서 연차 사용 이유를 묻는 등 연차를 유연하게 사용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가족 모두 함께하는 여행은 명절에나 겨우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휴가 사용이 자유롭지 않은 탓에 인천공항에는 명절마다 200만명에 가까운 여행객이 몰려든다. 가족과 함께 제대로 된 국외여행을 즐기려면 불가피하게 명절에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국내여행은 차량 정체로 힘들고 국외여행도 공항에 사람이 밀려 힘들었다“며 “누구나 원하는 시기에 여행을 계획할 수 있다면 피로도가 분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잘 먹고 푹 자는 것 이상의 ‘진짜 휴식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기업에서 일하는 김승우(28)씨는 “긴 연휴가 주어져도 쉬는 방법을 몰라 잠만 잤다. 긴 연휴를 거치면서 취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쉬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 제대로 쉬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며 “평소에 주5일 근무, 오후 6시 퇴근만 지켰어도 긴 연휴를 즐기는 법을 모르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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