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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외국인 노동자 죽음 내몬, 영어로만 번역된 고용허가제

등록 2017-10-23 16:03수정 2017-10-23 21:41

이주노동자 언어 다양한데 번역본은 영어뿐
네팔어·방글라데시어 등 13개 언어로 옮기기
이주노동자 노조·시민단체 뭉쳐 12월 마무리

충북 청주시에서 네팔쉼터를 운영하는 판데이 수니타(40)는 최근 책상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늘었다. 그의 책상엔 ‘외국인 근로자에 관한 법률’이 인쇄된 A4용지가 가득 쌓여 있다. 그는 고용노동부에서 내놓은 한국어·영어 번역본을 참고해 이 법안을 네팔어로 옮기고 있다. 이 법을 근거로 하는 ‘고용허가제’를 네팔 이주노동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충북대 대학원에서 컴퓨터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2006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수니타는 고용허가제로 신음하는 네팔 동포들을 돕다 2012년부터 청주에서 네팔쉼터를 운영 중이다. 수니타가 법안 번역을 시작한기 시작한 건 지난달부터다. 지난 여름 충북 충주시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던 네팔인 케샤브 슈레스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도 받았고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됐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수니타의 머릿속에 고용허가제로 어려움을 겪는 네팔인들이 떠올랐다. 법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쉼터를 열었더니 한 달에 30~50여건의 노동 관련 상담 전화가 걸려와요. 사업장을 변경하기 위해 사업자에게 200~300만원을 내고 탈출하듯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한국어가 서투른 이주노동자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업자에게 돈을 주는 게) 불법인지도 모르는 거죠.”

지난 9월2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위원장, 비영리교육단체 좋은교육연구소, 라임프렌즈 등이 모여 ‘다국어 번역 프로젝트’ 회의를 열었다. 사진 이주민들레 제공
지난 9월27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위원장, 비영리교육단체 좋은교육연구소, 라임프렌즈 등이 모여 ‘다국어 번역 프로젝트’ 회의를 열었다. 사진 이주민들레 제공
법령 전문을 네팔어·방글라데시어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인 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전문은 영어로만 번역돼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입국 시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취업교육기관에서 2박3일 16시간 동안 관련 법령의 일부분만 발췌해 짧은 기간 교육받는 데 그친다.

한국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게 법 조문인데, 수니타는 “번역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통역 봉사를 하고 노동 상담도 해오면서 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에서 주요 부분만 선별해 번역해둔 자료들도 참고하다 보니,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각종 자료를 집대성한다는 의의도 생겼다.

수니타의 뜻에 공감한 여러 단체가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이주민에게 법률 서비스를 지원하는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동’은 법령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자문을 맡았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은 네팔어와 방글라데시어로 이주노동자의 출입국을 규제하는 ‘출입국관리법’ 번역을 맡았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위원장은 “법 자체에 허점이 있어도 당사자들이 법 내용을 모르는 탓에 단순히 ‘사업주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법 적용을 받는 당사자가 법의 문제점을 알지 못하다보니 제대로 항의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청주청년이주민인권모임 이주민들레와 비영리교육단체 좋은교육연구소도 번역작업에 힘을 보탰다.

오는 12월 번역이 마무리되면 번역된 법률은 애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에 올라간다. 마침 비슷한 아이디어로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던 스타트업 ‘라임프렌즈’가 개발한 앱과 웹 플랫폼을 활용할 계획이다. 정영찬 라임프렌즈 대표는 “앱과 웹이 완성되면 집단 지성을 이용해 일정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법안 번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내년까지 13개 언어로 이주민에 필요한 법령을 번역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난민법 등으로 번역 범위도 확대하려 한다. 수니타는 “이렇게 번역된 법의 내용이 쉼터에 왔다 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이주노동자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파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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