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린 제18회 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이 종로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주 출신 레즈비언 나아무개(25)씨의 10대 시절 꿈은 ‘닥치고 서울행’이었다. 청소년기 그에게 성소수자 인맥이라곤 인터넷으로 사귄 친구들 두세명이 전부였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란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일이었지만, 가족이나 주변 친구에게는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서울 밖 퀴어의 삶은 황량하고 척박해요. 7~8년 전만 해도 저는 '광주에 퀴어가 없나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기필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꿈 꾸던 대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자마자 그는 가장 먼저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에 가입했다. “어려서부터 마음 속 이야기를 혼자 담아두고 삭히는 게 습관으로 굳어지니까 오프라인 성소수자 모임에 들어가 있어도 잘 변하지 않더라고요. 중고등학생 때 이런 모임이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외향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요?”
나씨처럼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성소수자는 ‘퀴어’와 ‘지역’이라는 이중의 소외감에 시달린다. 성소수자 문화 행사가 서울에 쏠려있는 데다, 지역에서는 보수적인 공동체 문화 때문에 자생적으로 성소수자 공동체를 꾸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어렵게 지역 내 성소수자 공동체를 찾더라도 친목을 위한 폐쇄적인 성격의 모임인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나아가 공개적인 활동에 참가하려면 지역 성소수자는 서울까지 먼 걸음을 해야 한다. 나씨는 당시에 성소수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더라도 공개적으로 모임 활동을 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예컨대 광주 충장로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려서 제가 거기에 간다면, 우리 엄마가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제보를 받고 달려올 수 있는 상황이에요. 광주는 지역 사회가 워낙 좁으니까요.”
울산 토박이 엔진(30·활동명)씨는 ‘논바이너리’다. 논바이너리는 남녀라는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스스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 같다는 정체성의 혼란은 중학교 1학년 때 시작됐다. 그가 지금처럼 자신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2년 전. 지역 내 성소수자 모임 ‘디스웨이’(This way·성소수자가 자신을 가리킬 때 쓰는 은어)를 만나면서부터다. “울산에서 성소수자 친구들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한때는 가슴제거수술까지도 고민했지만, 이제 내 몸에 대한 혐오가 사라졌거든요.”
그는 울산 지역에서 성소수자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엔진은 “서울에서 퀴어축제를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은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말한다. “먼저 혐오세력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고, 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권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직접 느끼면 자신감이 생겨요. 저는 울산에서 행복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 지역 성소수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지역사회에서도 성소수자 문화행사가 잇따라 열리면서 변화의 물꼬를 트고 있다. 지난 28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는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가 열렸고, 지난 9월23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부산 지역 첫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바 있다. 지난해까지 한국에 성소수자 문화축제를 개최하는 도시는 서울과 대구가 전부였으나 올해 부산과 제주가 합류하며 총 네곳으로 늘어난 것이다. 광주광역시와 전주시에서도 2018년 퀴어문화축제 개최를 목표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에 중심을 둔 시민단체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오는 11월부터 광주, 울산, 춘천, 대전 등 그동안 성소수자 지역 활동이 적었던 지역을 돌며 공연과 행진을 하는 행사 ‘퀴어라이브’를 열 예정이기도 하다.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의 소모임 ‘전국 퀴어 모여라’(전퀴모)의 재경(33·활동명)씨는 4년째 비수도권 성소수자의 지역 교류 활동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케이티엑스(KTX)로 전국 어디든 2~3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세상에 지역간 격차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고 말한다. 그는 “지역에서는 성소수자 축제를 해도 현지인은 못가요. 좁은 지역 사회에서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웃팅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성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도 생기고 보수성을 내면화하게 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전퀴모는 그동안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전주, 제주 등에서 지역 성소수자 행사를 열었다. 그중에는 전퀴모의 방문 이후 교류가 이어져 정식 지역 성소수자 모임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대전에서 전퀴모 행사를 마치고 어느 참가자가 적어준 짧은 후기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요. ‘숨통 트임’ 딱 네 글자였어요.” 벽장 속에 홀로 남은 성소수자들이 언제든 문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도록 전국 곳곳에 성소수자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재경씨의 목표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성소수자에게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활동하는 일은 단순한 관계 확장을 넘어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의 나라 사무국장은 “소수자성을 가지는 것조차도 집단적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자기 권리에 대한 감각은 성소수자 공동체 속에서 길러진다. 성소수자의 지역 활동을 어떻게 지역사회의 변화로 이끌 것인지가 성소수자 운동의 큰 과제”라고 말했다.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