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가인 김병로’ 출간 한인섭 교수
‘불가능한 현대사’.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4)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최근 가인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가인 김병로>(박영사)를 펴냈다. 가인은 청년기엔 의병항쟁에 뛰어들었고, 일제강점기엔 항일변호사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변론했다. 일제 말엔 슬기롭게 몸을 보전해 ‘친일의 늪’을 피했다. 해방 뒤엔 9년 동안 대법원장을 지내며 사법부 독립을 지켰고, 5·16 이후엔 군정에 맞서 야권 통합운동을 이끌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극히 공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비교할 인물을 찾기 힘들다는 게 한 교수의 생각이다. “(비교 대상으로)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을 생각할 수 있겠죠. 절개의 측면에서는 두 분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후세에 미친 영향력에선 차이가 있죠.”
24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한 교수는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이번 책은 2007년 이후 10년 동안 ‘삶의 터닝포인트(전환점)’로 삼으며 매달려온 일이었다.
“(2007년 이전엔) 우리 법조의 어두운 측면을 많이 봤어요. (법조를 두고) ‘권력의 시녀’ ‘육법당’이란 얘기를 많이 했잖아요. 춘추필법으로 엄정 비판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어두운 시기에도 빛나는 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빛줄기를 따라가 보니 희미한 불빛이 아니라 큰 줄기였어요. 법률의 기본 줄기였죠. 그 중심에 가인 김병로가 있었어요.”
“2007년 이후 삶의 전환점 삼아”
10년간 몰두해 ‘일대기’ 집대성
사료 발굴 ‘김병로 자료집’ 먼저 ‘박헌영’ 등 항일 변론 활동부터
‘이상적 형법학’ 등 입법가 ‘조명’
“가인 있었다면 4·19 없었을 수도” 책을 쓰기 위해 새로 찾은 1차 사료도 수백점이 넘는단다. 집필 단계에서 서너 차례 ‘김병로 자료집’을 엮기도 했다. 가인을 다룬 이전 책들과 차별성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 책들은) 대법원장이나 정치인 김병로의 삶에 초점을 맞췄죠. 항일 변호사 활동은 에피소드로만 소개했어요. 저는 항일 변론이나 입법가로서의 활동까지 전체를 조명하고 디테일까지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실제 1920년대와 30년대 항일 변론 활동에만 300쪽 가까이 할애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처음으로 쓴 형사법 논문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시기에 법전 편찬위원장으로서 주요 법률안의 초안을 직접 작성하고 입법으로 연결시키는 과정까지 법률가 가인의 행적을 세세히 드러냈다. 가인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소 뜻밖의 답이 나왔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형사법 전공자인 저에게는 가인이 일본 유학 중에 쓴 첫 글 ‘이상적 형법학의 구상’(1914)입니다. 보통 법률가는 법 해석을 하는데 가인은 글에 이상적이란 단어를 붙여요. 조선 독립을 생각하면서 법적인 차원에서 지적 준비를 한 것이죠. 첫 글이 미래에 대한 구상을 펼쳐 보이는 게 너무 좋아 보였어요.”
그는 가인이 기초를 잡은 형법 등 주요 법률에는 앞서 40년 동안 가인이 생각한 내용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했다. “가인은 법전 편찬위원장을 하면서 사회만 보지 않고 직접 초안을 다 썼어요. 일제 때 구금에서 첫 재판까지 3년이 걸리기도 했어요. 재판도 받기 전에 죽어 나가기도 했어요. 이걸 본 가인은 형사소송법을 만들 때 법정구속기간을 14개월로 제한했어요. 이 기한 안에 재판을 마쳐야 한다는 거죠. 당시 어느 나라에도 없던 획기적인 규정이었어요.” 가인이 박헌영 등을 변호한 조선공산당 사건(1925)은 첫 재판까지 20개월이 걸렸다.
가인이 1957년 대법원장을 퇴임한 뒤 사법부는 바로 이승만 권력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권력은 사법부를 등에 업고 58년 조봉암을 ‘사법살인’했고 그다음 해엔 <경향신문>을 무기정간시켰다. “50년대 말과 (유신 시절인) 70년대 말과 박근혜 정부 말이 너무 비슷합니다. 사법이나 언론, 야당과 같은 제도 안 견제세력을 파괴하면 자기 권력의 종말이 옵니다. 이승만 정부도 권력 남용을 하다 망했지요. 가인이 대법원장을 더 했다면 4·19가 안 났을 수도 있었겠죠.”
한 교수는 가인이 퇴직 뒤 이승만 정부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며 쓴 글들을 타이핑하면서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한다고 했다. “글이 절제되어 있고, 헌법이나 법률 논리가 완벽합니다.” 한 교수는 보안법 파동(1958년)을 예로 들었다. 당시 자유당은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을 의사당에서 내쫓고 법을 통과시켰다. “가인은 정부가 ‘악법도 법률’이란 논리를 펴자, 적법 절차를 밟지 않은 법은 아예 법률도 아니기에 ‘악법도 법’이란 말 자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법조인 50% 이상은 아마 가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할 겁니다. 저도 그래요. 가인과 함께 고 조영래(1947~1990) 변호사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조 변호사는 법조인으로 4~5년 정도 활동했어요. (일찍 별세하지 않았다면) 그 뒤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알 수 없어요. 긴 인생을 봐야죠.”
그는 5공 시절 사시 2차까지 합격한 뒤 면접에서 탈락했다. 면접에서 법조인이 되려는 이유로 “무변촌의 변호사로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변론을 하고 싶어서”라고 했단다. 뒤늦게 이 탈락에 정권 차원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2008년 합격증을 받았다. “25살 이전에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을 만나는 게 좋아요. 법대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가인은 ‘나도 이런 사람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할 겁니다.”
한 교수는 ‘페이스북 스타’다. “페북은 오픈 칼리지(개방대학)입니다. 많이 배워요. 사람들의 관심과 판단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만날 수 없는 분들을 만나죠. 공식 직함은 없는 시민 리더들이 참 많아요. 시적 정서와 리듬이 살아 있는 글쓰기 실험도 할 수 있어 좋아요. ‘가상대화체’도 그런 예이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가인의 삶에서 배울 게 많지만 아쉬운 대목도 있지 않을까? 한인섭 교수의 답이다. “가인은 남녀평등은 정치나 문화, 사회 등 가정 바깥의 영역에서 통용되어야 한다고 봤어요. 가정 안에서는 공적 평등이 적용될 수 없다고 본 것이죠. 이걸 두고 여성학자들은 가인이 가부장제를 정당화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당시 입법부와 언론은 훨씬 보수적이었어요. 가인은 간통죄 폐지를 주장했고 동성동본도 아주 가까운 혈족만 빼곤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했죠.”
10년간 몰두해 ‘일대기’ 집대성
사료 발굴 ‘김병로 자료집’ 먼저 ‘박헌영’ 등 항일 변론 활동부터
‘이상적 형법학’ 등 입법가 ‘조명’
“가인 있었다면 4·19 없었을 수도” 책을 쓰기 위해 새로 찾은 1차 사료도 수백점이 넘는단다. 집필 단계에서 서너 차례 ‘김병로 자료집’을 엮기도 했다. 가인을 다룬 이전 책들과 차별성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 책들은) 대법원장이나 정치인 김병로의 삶에 초점을 맞췄죠. 항일 변호사 활동은 에피소드로만 소개했어요. 저는 항일 변론이나 입법가로서의 활동까지 전체를 조명하고 디테일까지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실제 1920년대와 30년대 항일 변론 활동에만 300쪽 가까이 할애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처음으로 쓴 형사법 논문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시기에 법전 편찬위원장으로서 주요 법률안의 초안을 직접 작성하고 입법으로 연결시키는 과정까지 법률가 가인의 행적을 세세히 드러냈다. 가인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소 뜻밖의 답이 나왔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형사법 전공자인 저에게는 가인이 일본 유학 중에 쓴 첫 글 ‘이상적 형법학의 구상’(1914)입니다. 보통 법률가는 법 해석을 하는데 가인은 글에 이상적이란 단어를 붙여요. 조선 독립을 생각하면서 법적인 차원에서 지적 준비를 한 것이죠. 첫 글이 미래에 대한 구상을 펼쳐 보이는 게 너무 좋아 보였어요.”
한인섭 교수가 <가인 김병로> 출간에 앞서 따로 냈던 가인 김병로 자료집들.
<가인 김병로> 표지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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