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제4차 전국법관 대표회의에 참석한 법관들이 자료를 살피며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시작된 사법부의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실험’이 6개월 만에 ‘발전적 해체’로 막을 내렸다. 지난 6개월간 4차례 회의에서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와 판사회의 상설화 등을 논의하며 사법개혁의 포석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국법관대표회의(법관회의·의장 이성복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4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91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네번째 회의를 열고 공식활동을 마무리했다. 이날 법관회의는 법원행정처 상근판사를 점차 줄이고, 법관회의가 추천한 판사가 절반 이상 참여하는 합의제 위원회를 통해 사법행정을 논의할 것을 결의했다. 또 각급 법원에 사무분담을 논의할 위원회를 설치할 것도 건의했다. 사법행정권을 독점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행정처 권한을 분산하고, 인사권 일부를 판사들에게 돌려주자는 취지다. 법관회의 상설화 전까지 다리 노릇을 할 운영위원회 관련 논의는 온라인에서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 ‘블랙리스트 조사·법관회의 상설화’ 관철 지난 6개월간 법관회의에서는 전국 3000명의 판사가 손수 뽑은 100명의 대표가 머리를 맞댔다. 대법원장과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행정처)의 사법행정 권한을 일선 판사들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절차적·실질적 민주주의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한 판사는 “외부에 의한 ‘대대적 수술’ 없이도 내부 토론을 통해 개혁의 신호탄을 쐈다는 점에서 사법부의 자정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대표적인 성과로 꼽히는 것은 사법행정권 남용 관행에 제동을 건 부분이다. 지난 3월 행정처가 판사들의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탄압하고, ‘법관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이에 법관회의는 6월19일 첫 회의에서 사태에 책임이 있는 행정처 간부의 징계와 법관회의 상설화를 요구했고, 양승태 대법원장도 이를 받아들였다. ‘법관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 요구도 대법원장이 바뀌면서 현실화됐다. 김명수 신임 대법원장은 지난달 3일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하고,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조사위원장으로 지명했다.
■ ‘고법부장 폐지’ 해묵은 과제 해결 ‘제왕적 대법원장’의 원인으로 지목돼온 인사제도의 개혁을 견인한 것도 성과로 꼽힌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달 22일 고법부장 승진제도 폐지를 뼈대로 하는 인사개혁안을 내놨다. 지난 9월11일 3차 법관회의에서 “승진 비율이 소수에 불과해 사법행정에 순응하는 법관 관료화가 심화되는 문제가 있었다”며 결의한 ‘고법부장 부임 폐지 및 고법·지법 인사 이원화’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판사들이 기수와 나이를 막론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이어가면서 경직된 판사 사회의 서열 문화에 파열음을 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관회의가 끝나면 법원 내부통신망에 마련된 익명게시판엔 찬반 등 활발한 의견이 올라왔다. 법관회의 초기엔 회의 진행 방식을 둘러싼 문제 제기도 이어졌지만, 회의가 정착되면서 논란은 잦아들었다. 한 판사는 “그동안 법 이론이나 재판 실무를 빼곤 침묵하던 판사 사회에 토론의 물꼬가 트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다른 한 판사는 “법관회의가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상설 법관회의가 어떤 권한을 갖고 사법행정을 감시할지 구체화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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