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고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부씨가 동생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웃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외피를 깨고 나오는 모습의 이 그림은 신학철 화백이 지난 1987년 10월 민족미술협의회에서 주최한 ‘반고문전’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부활>이다.
고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부(60)씨는 오는 14일 박종철 열사 31주기를 앞두고 여느 해보다 더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의 휴대전화는 인터뷰 내내 쉴새 없이 울렸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던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이 최근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사회가 운영해야 한다는 국민 청원을 제기한 탓에 매일매일 취재 요청이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방송사에서 보내온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던 박씨는 “동생 일이다보니 할 수 있는 한 모든 취재 요청에 응하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영화 <1987>의 흥행을 두고 “지난 31년 동안 동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등 홍보활동을 꾸준히 해왔지만 영화 한 편으로 국민적 관심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영화의 힘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봐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던 그는 “영화를 본 뒤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전히 당시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도 말했다.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된 동생이 현실에 숨쉴 수 있도록 홍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 마음먹게 된 동기였다.
영화관에서 피어난 열기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마련된 경찰청 인권센터 방문객은 2011년 이후 하루 평균 10명 남짓에 그쳤지만, 영화가 개봉한 지난달 27일부터 2주 동안은 550여명의 시민들이 찾았다. 박씨는 “시민들 발걸음이 늘어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공간을 경찰이 제대로 운영하고 있지 않는 점은 아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에 따르면, 경찰은 내부 시설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하는 등 공간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박씨는 “연행자한테 위치 등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단순한 소방용 계단이라고 설명하는 등 공간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단순히 민주열사 유가족들의 기분이 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대사의 의미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또 경찰은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던 지난 2013년에는 사업회 쪽이 요청하는 주말 관람을 막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최근 박씨와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남영동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라는 청원을 청와대에 제기했다. 박씨는 “박종철기념관이 경찰이 운영하는 대공분실에 있는 걸 보면서 ‘종철이는 죽어서도 경찰 손아귀를 못 벗어나는구나’라는 생각에 항상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남영동이 아닌 다른 곳에 기념관 만들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지만, 대공분실이라는 공간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서 경찰과 마찰을 빚더라도 여기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버텼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어 “경찰이 운영주체로 있는 한 정권에 따라 갈등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라며 청원이 꼭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생의 31번째 기일을 맞이하는 그의 가장 큰 바람은 “경찰이 죽인 박종철을 경찰이 기념하는 기막힌 상황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는 “이 곳에서 고통을 받았던 수많은 민주인사, 학생, 조작간첩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교육하는 장소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재탄생 시키고 싶다”며 “경찰 손에서 종철이를 풀어줘야, 나중에 저 세상에서 동생을 만나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다니던 직장을 퇴직한 뒤인 2010년부터 사단법인 박종철기념사업회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사들과 그 가족을 돕고 있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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