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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내가 직접 들어간다” 천안함 수색중 떠난 한주호 준위의 품위

등록 2018-03-30 10:46수정 2018-03-30 17:36

[역사 속 오늘] 8년 전 오늘인 2010년 3월30일
해군 특수전여단 소속 한주호 준위, 천안함 수색 현장서 순직
해군 UDT 고 한주호 준위. <한겨레> 자료 사진.
해군 UDT 고 한주호 준위. <한겨레> 자료 사진.
“내가 경험이 많고 베테랑이니 직접 들어가겠다.”

해군 특수전여단 소속 한주호 준위는 실종자 수색 5일 째인 그날도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곳은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해 46명의 장병들이 실종된 사고 해역이었습니다. 계속된 수색과 높은 수압, 강한 유속은 건장한 청년 대원도 감당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준위는 오히려 숙련도 낮은 청년 대원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며 자신이 앞장서 수심 25m 바닷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식 같은 아이들이 물 아래에 있다’며 실종자 수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비 부족과 반복된 잠수로 인해 한 준위는 이미 몸에 상당한 부담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탈진한 한 준위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실신한 뒤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8년 전 오늘인 2010년 3월30일은 한 준위가 끝내 숨을 거둔 날입니다. 이날은 1975년 해군에 입대해 35년 간 잠수 요원으로 활약했던 그가 전역을 불과 1년 6개월 앞둔 시점이기도 합니다.

구조작업 중 사망한 한주호 준위가 사망 하루 전인 2010년 3월 29일 성인봉함에 올라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구조작업 중 사망한 한주호 준위가 사망 하루 전인 2010년 3월 29일 성인봉함에 올라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한 준위의 순직은 당시 수색 현장의 열악한 상황이 국민에게도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잠수사들이 심해에서 올라오면 잠수병 때문에 감압 체임버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고 현장에는 감압 체임버가 하나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한 준위가 사망 당시 사용했던 장비는 1980년대에 사용하던 30만 원짜리 낡은 장비였습니다. 버젓이 존재하는 200만 원짜리 최신 장비는 애초에 구비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수색작업은 안전 규정을 어겨가며 목숨 걸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잠수부들에게만 의지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후배들을 위해서 위험에 맞섰던 한 준위의 죽음은 어쩌면 정부의 ‘미흡한 대응’이 불러온 예견된 사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천안함 침몰 이후 정부의 현장 수색 과정과 사고 대책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함에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색 현장

-사고 이틀 뒤 구조함 도착

2010년 3월26일 밤 9시 22분께. 작전 임무 중이던 해군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쪽 2.5㎞ 해상에서 침몰했습니다. 승조원 104명 가운데 58명이 구조됐지만, 46명은 실종됐습니다.

해군 초계함 천안함의 침몰사고 닷새째인 30일 백령도 남해상 사고함의 함수가 발견지점을 표시한 부표 주변에서 UDT구조대원들이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다. 2010. 3. 30 <한겨레> 자료 사진.
해군 초계함 천안함의 침몰사고 닷새째인 30일 백령도 남해상 사고함의 함수가 발견지점을 표시한 부표 주변에서 UDT구조대원들이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다. 2010. 3. 30 <한겨레> 자료 사진.
한주호 준위를 비롯한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팀(UDT) 요원들은 사고 현장에 지원해 28일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구조 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조함은 사고 발생 이틀 뒤에 도착했고, 기뢰 탐지 능력을 갖춘 옹진함 등은 그보다 더 늦게 왔습니다. 게다가 정부는 침몰 함정을 예인할 크레인선이 4월 초에야 도착한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잠수요원들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바닷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열악한 장비, 고스란히 노출된 위험

잠수요원들은 제대로 된 장비하나 없이 구조 작업을 맨손으로 힘겹게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준위가 숨진 날에도 그는 실내 진입을 위한 인도용 쇠밧줄을 설치하는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수심 20m 이상이면 철판을 달아 ‘로봇’처럼 생긴 심해 잠수복이 투입돼야 했지만 이 역시 늦어져 잠수요원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해 백령도 장촌포구 서남쪽 1마일 해상 천암함 침몰지점(주황색 부표)인 연봉바위 인근 해역에서 경비 활동중이던 해군특수전여단( UDT/SEAL)이 고무보트를 타고 사고지점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서해 백령도 장촌포구 서남쪽 1마일 해상 천암함 침몰지점(주황색 부표)인 연봉바위 인근 해역에서 경비 활동중이던 해군특수전여단( UDT/SEAL)이 고무보트를 타고 사고지점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한국 해양 구조단 관계자는 “군이 구조 작업에 나서면서 조류 흐름이나 물 때, 유속 파악이 부정확했던 것 같다”며 “노하우가 있는 민간의 광범위한 전문가들을 활용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정부의 이런 무능한 대응 속에서도 잠수요원들은 수색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29일 저녁 8시13분에는 당시 승조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함미 틈새에 공기를 주입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야말로 정신력으로 일궈낸 성과였습니다. 다만, 골든타임이 이미 훌쩍 넘어버린 것에 안타까움이 커질 뿐이었습니다.

당시 천안함 실종자 가족협의회도 “순직한 한주호 준위 등 현장의 군 및 민간 잠수요원들이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군 당국의) 구조 지원 노력은 사실상 전무했다”며 정부의 사고 대책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이명박의 말말말

이처럼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고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대통령인 이명박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 여러 발언을 남겼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구조작업을 총괄 지휘하고 있는 독도함을 방문해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왼쪽)한테서 구조작업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남쪽 해상에서 구조작업을 총괄 지휘하고 있는 독도함을 방문해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왼쪽)한테서 구조작업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사고 이틀 뒤인 3월28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하되 섣부르게 예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4월1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 오찬 자리에서는 “내가 배를 만들어봐서 아는데 파도에도 그리될 수 있다. 높은 파도에 배가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과정에서도 생각보다 쉽게 부러질 수 있다”며 침몰 사고 초기의 태도에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북한이 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본다(4월20일)”거나 “바로 가까이 북한이 가장 호전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된다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보답도 될 것(4월21일)”이라며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강하게 내비쳤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TV와 라디오·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천안함 희생장병 추모 라디오·인터넷 연설'을 마친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2010.04.19.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TV와 라디오·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 '천안함 희생장병 추모 라디오·인터넷 연설'을 마친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다.2010.04.19. <한겨레> 자료 사진.
이런 가운데 정작 국가원수로서의 천안함 침몰 희생 장병에 대한 위로는 사고 발생 24일 뒤에야 이뤄졌습니다. 그는 4월 19일 ‘천안함 희생 장병 추모 연설’에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무한한 책임과 아픔을 통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마저도 천안함 선체가 인양된 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겨레> 자료 사진.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겨레> 자료 사진.
발언이 구설에 오른 것은 대통령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공성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일행 10여 명과 함께 한주호 준위의 빈소를 찾아 근조 화환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논란이 일자 공 위원은 “추모 의식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키웠습니다.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 2차회의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이 국회에서 열린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 2차회의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4월2일 열린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미흡한 구조작업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마음 같아서야 (잠수요원) 전 인원을 (바다에) 다 처박아 넣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저도 굉장히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 장관의 발언이 있던 바로 다음 날은 한주호 준위의 영결식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김 장관의 발언은 한 준위의 유족들과 그 시간에도 수색 현장을 지키고 있던 잠수요원들, 또 그 가족들에게까지도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겼습니다.

영원한 ‘사나이 UDT’ 한주호 준위

한주호 준위는 순직하기 1년 전인 2009년, 52살의 나이로 ‘군인으로서 실전 경험을 쌓겠다’며 소말리아 해역의 선박 보호 임무를 위해 파병된 청해부대 1진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청해부대 1진에서 최고령자였던 그는 바하마 국적의 노토스 스캔호에 대한 해적 공격 시 해적선에 직접 승선해 퇴치 작전에 참가하는 등 7차례에 걸쳐 해적을 퇴치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 특전 요원으로 활동 중 훈련장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저격수 횡이동 표적기와 탄·뇌관 보호 상자 등을 개선하고 제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가 제작한 선박 침투 습격용 사다리는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 UDT 대원들이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천안함 사고 당시 그는 작전부서가 아닌 작전지원부서에 재직 중임에도 불구하고 구조 현장에 직접 지원해 잠수요원으로 편성되었습니다. 게다가 한 준위는 숨진 당일에도 거센 조류 속에서 어려운 작업을 마친 뒤 다시 침몰된 함수 함장실에 탐색줄을 설치하는 작업에 자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한주호 준위 영결식에서 해군 특수전여단 대원들이 영결식장을 나서는 한 준위의 영정을 향해 군가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한주호 준위 영결식에서 해군 특수전여단 대원들이 영결식장을 나서는 한 준위의 영정을 향해 군가를 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한 준위는 주변에서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주변 사람에게는 솔선수범의 표본이 되는 사람”이라는 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은 영결식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한 준위의 운구 행렬을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팀 대원들이 막아서고 노래를 합창한 것입니다. 대원들은 고인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노래인 군가 ‘사나이 UDT’를 그의 영정을 향해 불렀습니다. 이로써 한 준위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전·현직 대원들이 부른 노랫말 가사처럼 “나라와 겨레 위해 바친 이 목숨, 믿음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나이”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실종자 구조작업중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을 찾아 고인의 영전에 헌화한 뒤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실종자 구조작업중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의 빈소가 마련된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을 찾아 고인의 영전에 헌화한 뒤 유족들을 위로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한 준위가 순직한 직후,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만 35년 이상의 군 근속자에게 수여되는 보국훈장 ‘광복장’만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정년 퇴임하는 공무원에게 모두 주어지는 수준의 훈장입니다. 그의 공로에 견주어 턱없이 부족한 예우라는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정부는 등 떠밀리 듯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합니다.

<한겨레> 2011년 3월 31일 치.
<한겨레> 2011년 3월 31일 치.
한 준위가 순직한 지 1년이 지난 2011년 3월31일, 그가 근무했던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인근 진해루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제막되었습니다. 받침대를 포함해 높이 3.6m의 동상은 한 준위가 보트를 타고 작전 지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동상으로 나마 평생 몸담았던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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