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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4·3 감옥살이 70년만에 법의 감옥서 풀려날까

등록 2018-03-31 13:28수정 2018-03-31 13:32

[토요판] 4·3 수형인들의 마지막 재판
①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삼성 이재용 선고에 이목 쏠린 날
제주에선 4·3 수형인들 마지막 재판
80~90살 생존자 18명 70년 만에
재심 청구로 법에 호소 10개월
재심 결정 위한 법원의 첫 심리

수형인 명부 인정 여부 등 청구 요건
4·3 희생자를 둘러싼 이념 논쟁 등
재판부 질문으로 맞닥뜨린 법의 벽
2005년 희생자 인정 뒤 보수단체 반발
지난 고통 치유받기까지 험로 예고
제주 4·3 당시 군사재판으로 옥살이를 한 피해 생존자 18명이 2017년 4월19일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연합뉴스
제주 4·3 당시 군사재판으로 옥살이를 한 피해 생존자 18명이 2017년 4월19일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연합뉴스

▶ 제주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생활을 했던 수형인 18명의 재심 개시를 따져보는 심문기일이 지난 2월5일 제주지법에서 시작됐습니다. 재판으로 볼 수도 없는 허술한 군사재판으로 징역을 살았던 희생자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식 재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제주 4·3 수형인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새겨진 재판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첫 심리를 시작으로 5차례 재판(2차 3월19일, 이후 4월30일·5월14일·6월14일 예정) 소식을 차례로 전합니다.

‘제주도 전역 눈, 특히 중산간 이상 많은 눈. 기온 큰 폭 하강, 낮은 체감온도. 매우 강한 바람, 매우 높은 물결.’

제주지방기상청의 2월5일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과 추위도 85~93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막지 못했다. 모자, 마스크, 목도리,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나선 이들의 목적지는 제주도 제주시에 있는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법정에 들어가기 전 법원 건물 앞에 김평국(88)·박동수(85)·부원휴(89)·양일화(89)·양근방(85)·오계춘(93)·현우룡(93)·현창용(86)씨가 섰다. 모든 국민의 관심이 이날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선고에 쏠려 있던 바로 그 시간에 ‘제주 4·3 수형인’인 이들은 ‘마지막 재판’을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재판을 해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제주지법을 처음 찾은 건 지난해 봄이었다. 손에는 ‘4·3 당시 군법회의 재심 청구서’라고 적힌 서류봉투를 들고 2017년 4월19일 법원 정문에 세워진 큰 돌하르방을 지나 더러는 지팡이를 짚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법원 건물로 향했다.

“더 늦게 전에 재판을 해서, 이겨서 우리 4·3 사람들도 사람이다….”

김평국씨는 <제주 문화방송(MBC)>과의 인터뷰에서 법원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를 포함해 80~90대 나이의 제주 4·3 수형인 생존자 18명은 이날 재심을 청구했다. 소년·소녀 시절 그들이 겪은 고초는 70년 전 제주에서 일어난 일과 깊게 연결돼 있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도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경찰의 총성이 울렸다. 민간인 6명이 숨졌다. 3·1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이자 시민들이 항의하던 중이었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경찰에 맞서 3월10일부터 공무원과 직장인까지 총파업을 벌였다. 경찰은 파업 관련자를 체포한다, 8·15 기념일을 단속한다 등의 명목으로 다음해 4·3 무장봉기 전까지 1년 동안 2500여명을 검거했다. 경찰 고문으로 죽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주민과 경찰의 충돌이 잦아진데다 1948년 5월10일 남한의 단독선거 소식이 전해지자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3일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군과 무장대의 평화협상으로 끝나는가 했던 사건은 1948년 5월1일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면서 계속됐다. 이승만 정부는 강경진압을 선택했고,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1948년 10월17일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위반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군이 행정·사법을 맡으며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제도)을 선포하면서 남녀노소 따지지 않는 학살이 시작됐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은 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제주 4·3의 희생자들인 수형인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고등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2530명을 말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형무소에서 총살돼 ‘행방불명’된 이들도 많았지만 재심 청구인들은 살아 제주로 돌아왔다. 그들은 70년이 흐른 뒤에야 “불법으로 체포·감금돼 고문,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유무죄를 따질 수 있는 재심을 시작해달라고 법원에 요구했다. 재심 청구가 늦어졌던 이유에 대해 양동윤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는 말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삶과 죽음, 공권력에 대한 트라우마입니다. 또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움과 공포가 컸기에 재심은커녕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위원회)에 신고하지 못한 분도 많습니다.”

‘희생자 옥석론’ 등 첫 심리부터 ‘벽’

재심을 청구하면, 법원은 재심 청구가 이유 있다고 인정한 경우 재심 개시를 결정한 뒤 열리는 공판(형사재판)에서 유무죄 여부를 판단한다. 법원은 재심 청구에 대해서도 필요한 경우 심문기일을 열어 사실을 조사하거나 당사자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 제주 4·3이 남긴 상처 말고도 이들이 넘어야 할 벽은 많았다. 재심 청구 8개월 만인 2월5일 열린 첫 심문기일에서 재판부가 던진 세 가지 질문은 4·3 수형인들이 마주한 ‘법의 벽’이었다.

“재심은 유죄 확정판결에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 과연 유죄의 확정 판결이 있었던 걸로 볼 수 있을까요? 재심 대상 판결 특정이 가능한가요?”

제주지법 형사2부 재판장인 제갈창(51·사법연수원 31기) 부장판사가 변호사들에게 물었다.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법정 방청석에서 본 재판부는 높고 멀었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4·3 수형인들은 경찰 등 공무원이 불법 감금, 폭행으로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지만 공소시효로 이들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재심 사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불법 감금이나 폭행이 인정되더라도 1948년과 1949년의 군사재판은 공소장, 증거, 재판기록, 판결문 등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유죄의 확정판결’이 존재한다고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4·3 수형인들을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가 답했다.

“4·3 당시 군법회의의 불법성은 명확하지만, 문제는 그 불법 재판에 희생된 분들의 명예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였습니다. 저희도 오랜 시간 법률검토를 하면서 아예 재판도 없는 형무소 불법구금으로 보고 바로 국가배상 청구를 할지, 행정소송으로서 재판부존재 확인소송 등을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적합하더라도 군·경의 수사, 법정에서의 절차, 이후 각 형량에 따라 형무소 수감, 그리고 전과기록까지 살펴볼 때 재판에 준하는 공권력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재심을 통해 과거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를 바로잡고 국가의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형인 명부에도 명백하게 항변, 판정, 언도일자(선고날짜) 등이 기재돼 있습니다.”

변호인의 답변에 재판부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수형인 명부 자체는 인정하시는 건가요? 사후에 위작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세상에 공개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 특별법 제정 공약 이행을 촉구받는 사이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냈다. 명부의 표지에는 ‘단기 4281년 12월, 단기 4282년 7월(군법회의분) 수형인 명부, 제주지방검찰청’이라고 적혀 있다. 명부는 군사재판 설치 근거인 ‘고등군법회의 명령’ 등 문서 20건과 1948년 군사재판을 받은 871명, 1949년 군사재판을 받은 1659명의 인적사항, 항변, 판정, 판결 항목, 언도일자, 복형 장소(형무소)가 적힌 별지로 구성됐다.

재판부의 질문에 대해 장완익 변호사는 “청구인들 입장에서 찾을 수 있는 기록은 수형인 명부밖에 없습니다. 위·변작을 주장하는 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사실을 기재했는데 통계상의 오류가 있는 게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도 “조작 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조작이라기보다는 기재의 오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재심 청구인이 진술하는 수용소 이름, 수감 기간 등은 수형인 명부 기재와 모두 일치합니다. 청구인뿐만 아니라 4·3사건 희생자들의 광범위한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수형인 명부는 당시 사건에 대한 공신력 있는 문서로 보이고, 판결 기록을 담은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불법 구금과 고문을 받았다면 재심 개시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안 판단(유무죄 판단)이 가능할까요? 공소사실을 모르는데 심리를 할 수 있을까요?”

재판부의 세 번째 질문은 재심 개시가 결정되면 재심에서 벌어질 현실적인 고민이다. 이에 대해 장 변호사는 “재심 청구인들이 가장 묻고 싶은 건 왜 죄를 뒤집어씌우고 징역형을 살게 했느냐는 겁니다. 그 부분은 형을 산 사람이 아니라 국가가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심 청구 이유는 청구인이 입증해야 하지만, 형사재판을 다시 하는 재심에서는 검사가 피고인의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 4·3의 생존 수형자 18명이 2017년 4월19일 변호인과 함께 제주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제주/연합뉴스
제주 4·3의 생존 수형자 18명이 2017년 4월19일 변호인과 함께 제주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제주/연합뉴스
“죽는 날까지 한이 없기를”

재판부의 마지막 질문은 4·3 수형인들을 평생 동안 옭아맸던 ‘현실의 벽’이었다.

“제주 4·3 사건에는 무력충돌과 무고한 주민의 희생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합니다. 특별법이 말하는 희생당했다는 표현 속에는 억울하고 무고한 사람의 개념이 포함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무장유격대, 남로당 활동을 하거나 이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도 있는 만큼 옥석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에서 이념으로 불가피하게 싸운 모든 사람이 아니라 무고하게 피해를 받은 주민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장 변호사는 “당시 불법 구금, 고문을 받고 외관상에 불과하더라도 재판이 이뤄져 처벌을 받았다면 무고하든 무고하지 않든 관계없이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재판이 끝날 무렵 양일화씨가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마이크를 들었다.

“몇 년 안 남은 인생인데 명예회복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에 잘못한 게 아닌데, 형무소에 갇혀가지고 길을 막고 있습니다. 노인네들이 자꾸 와서 재판관님 앞에서 말을 드릴 때에는 자꾸 머리가 아프지만 죽는 날까지 한이 없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양씨의 이름을 들은 재판부가 물었다.

“북한 의용군은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나서 강제로 된 거죠?”

1948년 군사재판을 거쳐 인천형무소에 수용된 양씨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수용소 문이 열리면서 북한 의용군에 편입됐지만, 군인에게 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제주도에 돌아온 뒤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양동윤 대표가 “당시 대한민국 공권력은 도망갔고 인민군이 접수했는데 누가 그걸 거부하겠습니까. 이념으로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저분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라고 대신 답했다. “당시 북한 의용군에 부득이하게 강제로 편입된 사람도, 자원입대한 사람도 있다고 해서요”라고 재판부가 설명하자 양 대표는 “그때 상황에 대해 고려해주길 바랍니다”라고 덧붙였다.

4·3 수형인에 대한 평가는 위원회 출범 뒤에도 보수단체의 반대로 논란이 됐다. 하지만 2003년 위원회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에서 “1948년과 1949년에 이뤄진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재판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5년 처음으로 수형자 606명을 4·3 희생자로 인정했다.

2007년 특별법 개정으로 희생자 정의에 ‘수형자’가 추가됐지만 2009년 보수단체 회원 등은 “희생자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끝까지 반발했다. 그들의 주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해 명예를 회복해주는 것이어서 위법하다”, “수형자까지도 희생자로 인정해 그들을 진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기여한 청구인들을 가해자로 인정해 명예권을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소송은 직접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각하됐다. 21세기의 법원은 20세기 이념논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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