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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한국군이 학살하던 그날의 비명 아직도 들린다”

등록 2018-04-23 04:59수정 2018-04-23 08:10

베트남 민간인 학살 시민평화법정
200여명 희생 하미·퐁니·퐁넛마을
피해자 2명 원고 자격 한국땅 밟아
“밭일하던 어머니 등 몰아넣고 죽여”

재판부 “진실 발견·치유 자리 돼야”
피고쪽 “게릴라전 의도치 않은 희생”
방청 시민들은 연대의 뜻 이어가
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원고 응우옌티안(앞줄 왼쪽과 오른쪽·동명이인)이 참석해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2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 원고 응우옌티안(앞줄 왼쪽과 오른쪽·동명이인)이 참석해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7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됐는데 과연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볼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파병 기간 전체에 걸쳐 발생한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가지게 된다…. 주문. 대한민국은 원고들에게 국가배상법 배상 기준에 따라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공식 사과하라.”

22일 오후 5시, 이틀에 걸친 ‘베트남학살 진상규명 모의법정’이 끝나고 재판부가 선고 결과를 낭독하자 응우옌티탄(58)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줄곧 굳어 있던 입가에도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가족 5명을 잃은 지 꼭 50년 만에 받아낸 배상 판결이었다. “몸이 다 떨립니다. 기쁜 소식을 갖고 베트남으로 당당하게 돌아갑니다. 다른 희생자분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을 규명하려는 ‘시민평화법정’이 21~22일 이틀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렸다. 한국군이 135명의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 조사된 하미마을 피해자 응우옌티탄(60), 74명이 살해당한 퐁니·퐁넛마을의 응우옌티탄, 동명인 두 사람이 국가배상소송 원고로 한국 땅을 밟았다. 자신과 가족이 입은 피해에 대해 한국 정부의 손해배상금 지급과 진상조사 등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모의법정 형태라 강제력은 없지만,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공론화를 촉구하는 취지로 마련된 행사다.

김영란 전 대법관과 이석태 전 세월호특별조사위원장(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법정 재판부는 이들의 청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먼저 피해자 증언 등을 토대로 두 마을에서 20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인정한 뒤, 두 명의 원고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과 공식 사과를 주문했다. 재판부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은 피고 ‘대한민국’ 대리인으로 나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이 “적군과 우군을 구분하기 힘든 게릴라전 상황에서 발생한 의도치 않은 희생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대부분의 희생자가 노인과 어린이, 여성이었다. 의도된 집단 학살이라고 판단된다”고 짚었다. 재판부는 이어 한국군 참전 기간(1964~1973) 동안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불법행위 일체에 대해 진상조사를 벌일 것도 권고했다. 또 “인권침해 사실이 후속 세대에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등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전시 공간에 진상조사 결과를 명시하라고 판결했다.

“과거의 불행을 정직하게 드러내 직시하고, 진실을 공유하면서 위로와 함께 온당한 치유책을 마련하자.” 시민법정 첫날인 21일 오전, 이석태 변호사가 재판 시작을 알렸다. 곧 퐁니·퐁넛마을 학살 당시 참전했던 한 군인의 진술이 담긴 영상이 법정에서 재생됐다. 그는 “고참병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할아버지를 총으로 쐈다. 군인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응우옌티탄은 퐁니·퐁넛마을 8살 아이로 돌아가 증언했다. 그는 1968년 2월12일 배에 총을 맞았다. 오빠의 엉덩이, 남동생의 입도 망가뜨렸다고 했다. “주검으로 덮인 논을 하나씩 지나면서 계속 ‘엄마, 엄마’ 불렀습니다. 알고 보니 주검 무더기 속에 저희 어머니도 있었다고 해요. 밭에서 야채를 뽑고 있었는데, 한국군이 한쪽으로 몰아넣고 죽였다고 해요.” 열흘 만에 ‘하미’도 ‘퐁니’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 방공호에 던져진 수류탄은 응우옌티탄의 왼쪽 귀 청력뿐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까지 앗아갔다. “동생이 혼수상태에서 사흘간 ‘엄마, 일어나서 밥 지어줘요’ 하더니 죽었어요. 요즘도 그날의 비명, 동생이 엄마를 부르던 소리가 들려요.” 통역인 응우옌(34)의 눈물 섞인 통역에 피고 대리인을 포함한 온 법정이 흐느꼈다.

이번 재판에는 시민평화법정 헌장에 따라 현실에선 적용되기 어려운 몇 가지 원칙들이 적용됐다. 배상청구권 소멸시효는 실제 소송 때 가장 큰 난관이 될 수 있지만, 시민평화법정 헌장은 “소멸시효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두 응우옌티탄에게 질문을 할 권리도 재판부만 가졌다. 50년 만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는 이들에게 2차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방청석을 가득 채운 300여명의 시민은 연대의 뜻을 전달했다. 경기 남양주 호평중학교에서 온 학생들은 이틀간 홍보 부스를 운영했고, 두 피해자를 직접 그린 그림도 전달했다. 올여름 베트남전 피해 지역 봉사활동을 앞두고 법정을 찾은 이상협(15)군은 “국가가 전쟁이란 명분 아래 이런 일을 했다면,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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