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으로 판정된 긴급조치 9호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구금됐다가 긴급조치 위반 외의 다른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에도 수사기관의 불법 체포·감금과 마찬가지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긴급조치 위반 확정판결에 대해선 긴급조치 자체가 위헌으로 판명됐다는 이유로 재심이 허용됐지만, 긴급조치로 영장 없이 체포됐다가 다른 범죄에 대해 유죄가 확정된 경우에도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재심을 받아들인 것은 처음이다.
대법원 2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2일 검찰이 서울고법의 재심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재심인용 결정 재항고 사건에서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개시 결정을 확정했다고 3일 밝혔다.
재판부는 “형식상 존재하는 당시의 법령(긴급조치 9호)에 따른 체포·구금이라도 그 법령 자체가 위헌이라면 결과적으로 그 수사에 기초한 공소제기에 따른 유죄 확정판결에는 형법 제124조 수사기관의 불법 체포·감금죄와 마찬가지로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원심결정이 옳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영장주의를 배제하는 위헌적 법령(긴급조치 9호)에 따라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한 경우에도 불법 체포·감금의 직무범죄가 인정되는 경우에 준해 재심사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합치적 해석”이라고 밝혔다.
긴급조치 9호는 제8항에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수 있도록 했으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4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고 선고했다.
최아무개씨는 1979년 7월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영장 없이 체포돼 열흘 동안 구금돼 수사를 받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반공법 위반, 사기, 업무상횡령 혐의로 기소됐다. 항소심 재판 중이던 그해 12월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자, 법원은 긴급조치 9호 위반에 대해 면소를 선고하고 나머지 혐의는 유죄를 확정했다.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를 위헌으로 판단하자, 이미 사망한 최씨를 대신해 아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에서는 사건 당시의 법령에 따른 체포·구금도 불법 체포·감금으로 공무원의 직무범죄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형사소송법은 원래 판결 및 관련 수사에 관여한 공무원이 직무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정판결로 입증되는 경우를 재심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서울고법은 “당시 경찰관들의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처벌할 수는 없지만 형법 제124조 수사기관의 불법 체포·감금죄의 구성요건에는 해당한다”며 “이는 형사소송법이 재심사유로 정한 공무원의 직무범죄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재심개시를 결정했다. 이에 검찰은 “경찰의 행위는 당시의 유효한 법령에 따른 것일 뿐 직권 남용이 아니므로 불법 체포·감금죄의 구성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영장주의를 배제하는 법령 자체가 위헌이라면 결국 헌법상 영장주의를 위반해 영장 없는 체포·구금을 한 것이고, 그로 인해 빚어진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수사기관이 형법 제124조의 불법 체포·감금죄를 범한 경우와 다르지 않다”며 “만일 이런 경우를 재심사유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대한 흠이 있는데도 단지 위헌적 법령이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흠을 바로잡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수사기관의 영장 없는 체포·구금 행위가 당시의 법령상으로 불법 체포·감금죄가 되는 경우에만 공무원의 직무범죄에 따른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면 위헌적 법령 때문에 갖출 수 없는 요건을 요구해 재심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며 “이는 확정판결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면 법적 안정성을 후퇴시키더라도 구체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재심제도의 이념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영장 없는 체포·구금의 근거가 위헌적 법령이라면 당시 수사기관에 형법 제124조의 불법 체포·감금죄가 성립하는지는 따질 필요가 없다는 새로운 법리를 제시한 결정”이라며 “긴급조치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해 재심의 문을 더 크게 열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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