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부동산을 팔기로 하고 계약금과 중도금까지 받은 뒤 이중으로 매도한 경우에는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17일 상가 점포를 13억8천만원에 팔기로 계약하고 계약금 2억원과 중도금 6억원까지 받은 뒤 다른 사람에게 이중으로 매도하고 등기까지 마쳐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권아무개(68)씨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사건 상고심에서 배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판결에는 재판부 13명 가운데 5명의 대법관이 반대의견을 냈다.
재판에서는 중도금 지급 이후의 부동산 이중매매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인지가 쟁점이 됐다. 배임죄는 다른 사람의 재산상 이익을 보호·관리해야 할 신임관계에 있는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 다른 사람의 재산상 이익을 침해할 때 성립하는 범죄다.
대법원은 “부동산 매매계약에서 중도금 지급으로 서로 임의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매도인에게는 매수인의 재산적 이익을 보호·관리해야 할 신임관계가 발생한다”며 “이때 부동산을 이중으로 매도하면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다수의견은 “계약금만 지급된 단계에서는 어느 당사자나 계약금을 포기하거나 배액을 상환해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중도금을 지급한 단계에서는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소유권을 이전해줘야 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매수인은 매도인이 소유권을 이전해 줄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중도금을 지급한 것이므로 이 단계에 이르면 매도인은 매수인의 재산적 이익을 보호·관리할 신임관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다수의견은 이어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부동산 매도인이 중도금을 지급 받은 뒤 해당 부동산을 제3자에게 처분하면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해왔다”며 “이런 판례의 법리가 매수인 보호 역할을 수행해왔고, 이로 인해 부동산 거래의 혼란이 일어나거나 계약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반면에, 김창석·김신·조희대·권순일·박정화 대법관 등은 ‘부동산 이중매도에는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상고기각을 주장하는 반대의견을 냈다.
반대의견은 “부동산 매도인의 소유권 이전 의무는 매매계약에 따른 ‘자기의 사무’로, 배임죄의 요건인 ‘타인 즉 매수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따라, 형벌 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해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 대법관은 “매도인의 소유권 이전 의무나 매수인의 대금지급 의무는 모두 매매계약에 따른 각자의 ‘자기의 사무’일 뿐”이라며 “중도금이 오갔다고 해서 이들 관계가 변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의견은 이어 “이미 동산의 이중매매에 대해서는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는데, 부동산이라고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며 “(이런 문제는) 민사상 채무불이행의 문제로 처리해 이행불능에 따른 손해배상 등을 청구하면 될 사안으로 형벌 처벌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권씨는 2014년 8월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상가 점포를 13억8천만원에 팔기로 계약을 맺고 중도금까지 8억원을 받았으나, 점포에 세든 임차인과의 분쟁으로 점포를 넘겨줄 수 없게 되자 매수인들로부터 ‘큰 금액의 손해합의금을 주지 않으면 소유권 이전을 받지 않겠다’는 압박을 받는 등 알력을 빚었다. 권씨는 분쟁이 이어지던 중인 2015년 4월 다른 사람과 15억원의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쳐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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