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병이 있는 노동자가 추운 날씨에 힘들게 작업하다 지병 악화로 쓰러졌다면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사망으로 볼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일용직 근로자 윤아무개(사망 당시 53)씨의 아내 박아무개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의 원심 판결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재판부는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서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며 “윤씨의 업무와 사망 원인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윤씨는 2015년 12월 ㅈ건설의 오피스텔 신축공사 현장에서 도장공으로 일하다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숨졌다. 윤씨는 고혈압과 불안정 협심증 등의 질환이 있었으며, 사망 당일 최저기온은 -3℃였지만 체감온도가 10℃ 이상 급격히 낮아진 상태였다. 윤씨는 고층 건물 외부의 강한 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채, 점심 직후 휴식시간도 없이 20㎏ 정도 되는 페인트통을 위층으로 운반하는 업무를 혼자서 해야 했다.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이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윤씨의 사인이 불분명할뿐더러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윤씨의 근무 일수가 보름에 불과하고 연장근로도 하지 않은 점 등에 비춰 만성적인 과로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윤씨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더라도 이는 고혈압 등 기존 질환의 악화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2심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과 달리 “윤씨가 고혈압, 불안정 협심증 등의 기존 질환을 가진 상태에서 급격한 근무환경 변화와 업무 강도의 증가로 육체적·정신적 과로가 누적됐고, 이 때문에 기존 질환이 자연적인 진행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심근경색이 유발됐다고 추단할 여지가 있다”며 사망과 업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윤씨가 지병이 있었음에도 충분한 휴식 없이 연이어 근무를 했고, 특히 사망 당일에는 전날보다 체감온도가 10℃ 이상 저하된 상태에서 고층 건물 외부의 강한 바람과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채 별다른 휴식시간 없이 작업을 계속했다”며 “온도가 10℃ 감소하면 급성심근경색의 위험이 7% 증가한다고 하고, 당시 체감온도가 10℃ 더 낮으므로 위험도가 증가했을 것으로 추단된다”고 밝혔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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