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대 기숙사 저지 공약 내건 후보 역풍 맞고 철회
고려대에선 학생들이 캠퍼스로 주소 이전 캠페인 벌이기도
한양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들이 지난해 연말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숙사 신축을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서울 성동구에서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영섭 자유한국당 후보는 지역구에 있는 한양대 ‘대학 기숙사 신축 저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원주민 생계 위협하는 한양대학교 기숙사 신축을 막겠다”고 밝혔다가 거센 역풍에 휩싸였다. “1800명 입실 가능한 규모의 기숙사가 들어서면 주변도로 교통 혼잡은 물론, 원룸임대 수익으로 생활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생계가 위태로워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가, 한양대 학생들과 주민들의 비판 여론에 직면한 것이다. 한 후보는 논란이 된 지 하루만인 지난 5일 공약 철회를 선언했다. 한 시민이 문제를 제기하며 남긴 페이스북 글에는 “죄송하다”, “원룸 하는 분들 말만 들은 것 같다”, “기숙사가 들어서면 지역이 활성화되리라 생각한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기숙사 반대 공약이 담긴, 이미 배포된 공보물까지 수거할 수는 없었다.
서울 성동구에서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영섭 자유한국당 후보의 공약.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책공약알리미 policy.nec.go.kr
지역주민들과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의 기숙사 혹은 원룸 등 주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쟁점이 되고 있다. 지방선거 후보자들이 일부 지역주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기숙사 반대 철회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대보다 오랜 기간 기숙사 문제로 갈등을 겪어온 곳이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다. 이곳 주민들은 2013년부터 산림 훼손과 녹지 부족 등의 이유로 개운산 학교 부지 내 기숙사 신축을 반대해왔다. 20대 총선을 앞둔 2016년 봄,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는 재학생들이 기숙사 건립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지역 유권자가 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기숙사 신축 추진을 위한 성북구 주소 이전 교내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5년째 갈등이 이어지면서,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성북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오식 자유한국당 후보가 ‘기숙사 신축을 막고 개운산 공원을 지키겠다’는 내용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역시 고려대생들의 비판을 받았다.
성북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오식 자유한국당 후보의 공보물.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책공약알리미 policy.nec.go.kr
대학생연합기숙사인 행복기숙사 건립을 추진하던 성북구 동소문동에서는 공사 소음과 분진 문제 외에도 ‘대학생들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애정 행각을 벌여 아이들에 교육적으로 해롭다’는 이유로 행복기숙사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이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행복기숙사추진반대위원회’ 관계자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행복기숙사 건립 부지가 “단체장들이 선거 때마다 공원을 짓겠다고 한 땅”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선거 때 내건 공약이 기존 주민들과 새로 그 공간에 입주하려는 청년들 사이에서 갈등을 키우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청년 주거 시설을 둘러싼 갈등은 대학 밖에서도 벌어진다. 대표적인 갈등이 청년임대주택 건설 반대 움직임이다. 주민들은 부동산 가격 하락, 지역 내 청년 문화 유입에 대한 반감 등을 이유로 청년임대주택 건설에 반대하고 있다. 서울시가 청년임대주택 건설 부지로 정한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아파트 단지가 대표적이다. 이 단지에는 ‘5평짜리 임대 아파트 결사 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다. 지난 4월, 해당 아파트 주민이 찍은 ‘5평형 빈민아파트 신축 건’이라는 제목의 주민 안내문은 인터넷에서 공분을 부르며 6월 현재까지 1100건 넘게 공유됐다. 이 안내문에서도 청년임대주택으로 인해 “아파트 가격이 폭락”하고 “심각한 교통혼잡 문제가 발생”하며 “빈민지역 슬럼화로 범죄 및 우범지역 등 이미지 손상” 등을 이유로 내걸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걸린 ‘5평형 빈민아파트 신축 건’이라는 제목의 주민 안내문.
반면 이번 지방선거에선 청년 주거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서울시장 후보들도 등장했다. 김종민 정의당 후보와 우인철 우리미래당 후보가 대표적이다. 우 후보는 서울시 청년 주거빈곤율을 전국 평균 이하로 낮추겠다며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폐지’를 1순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 후보는 지난 5월 고려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기숙사 수용률 30% 이상 의무화’, ‘1인 가구 맞춤 소형임대주택’ 등의 주거 관련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기숙사와 청년 주택을 둘러싼 갈등은 어쩌면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선 먼 나라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지역에선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지방대가 폐쇄되고, 수도권과의 부동산 가격 격차 등의 이슈가 있기 때문에 대도시의 단체장 후보들은 당 성향과 관계없이 지역 내 기숙사 확충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한 권영진 자유한국당 후보는 청년·신혼부부 행복주택과 대학생 행복기숙사 지원을 공약했고, 광주시장 선거에 출마한 윤민호 민중당 후보는 청년 월세 10만원 상한제와 대학 기숙사 설립 확대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자유한국당 김방훈 후보는 서울에 제주도 출신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제주도립기숙사의 수용 인원을 늘리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박수진 기자 sujean.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