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근처에서 열린 ‘2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참가자들이 경찰의 성차별 편파수사를 비판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대학생 김아무개(20)씨는 지난 4일 밤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김씨에게 한 남성이 다가와 “자위하고 싶다, 만지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남성을 112에 신고했다. 하지만 김씨는 경찰로부터 “신체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김씨는 “만지지 않았다고 해서 공포의 크기가 작은 게 아니었다. 접촉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직장인 오아무개(27)씨도 6년 전 ‘그 날’ 이후 밤에 지하철을 타기가 무섭다고 털어놨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막차를 타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같은 칸에 탄 남성이 이유 없이 자꾸 쳐다보다가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자위행위를 했다. 깜짝 놀라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내린 오씨는 역무원에게 신고했다. 역무원은 “열차가 떠나 어차피 지금은 못 잡으니 다음 역에서 잡으라고 하겠다”고 말했지만, 별다른 조처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씨는 “그때 그 남성이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한동안 밤에 집에 갈 때마다 무서워 가족들에게 마중을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성폭력에는 김씨나 오씨가 겪었던 ‘비접촉 성범죄’가 엄연히 존재한다. 불법촬영이나 촬영물 무단 유포가 대표적인 경우이고, 이른바 ‘바바리맨’(공연음란죄)도 이에 해당한다. 비접촉 성범죄 피해자들은 “신체 접촉 성폭력과 다를 게 뭐냐”고 말한다. 하지만 수사기관과 법원은 이런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제대로 된 법이 없어 처벌도 마땅치 않다. 법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 셈이다. 특히 김씨가 겪은 언어적 성희롱 등은 형사처벌을 할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지나가는 여성에게 휘파람 소리를 내거나 성적인 발언을 하면 처벌하는 ‘캣콜링 처벌법'이 지난달 만들어지기도 했다.
불법촬영이나 유포 등의 범죄도 10건 중 7건이 벌금형에 그친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인격 살인’에 가까운 범죄이지만 실제로는 가벼운 처벌로 사건이 끝나는 셈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의 김현아 변호사는 “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불법 촬영물이 유포되는 속도가 매우 빨라졌고, 한 번 유포되면 되돌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만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는 ‘언어적 성희롱’, ‘불법촬영’ 등을 포함한 비접촉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몇 건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각 정당들의 주요 관심 법안은 아니다. ‘미투’로 촉발돼 ‘혜화역 시위’ 등으로 점차 거세지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국회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에 바바리맨이라는 올드한 비접촉 성범죄가 있었다면 최근에는 ‘유튜버’ 양예원씨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형태의 범죄가 나타나고 있다”며 “‘접촉이 없으니 피해가 대단하지 않다’고 경시해온 것이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도 “비접촉 성범죄가 가볍게 다뤄진 이유는 범죄의 요건을 만들고 처벌의 경중을 정하는데 가부장적 시각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라며 “지금이라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반영해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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