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2만명 ‘양심’의 고통, 이번 헌재 선고로 끝나길”

등록 2018-06-27 19:38수정 2018-06-28 09:41

‘양심적 병역거부’ 오태양씨의 바람

“불교도로서 병역거부한 2001년
이미 1만여 청년이 감옥에 갔고
지금까지 또 1만명이 고통을 받아
총 들 수 없다는 신념 억압 말고
감옥 아닌 다른 선택지 주어지길”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기 하루 전인 27일 오후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오태양 우리미래당 비대위원장이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평화’를 뜻하는 단어가 적힌 흰 종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기 하루 전인 27일 오후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개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오태양 우리미래당 비대위원장이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평화’를 뜻하는 단어가 적힌 흰 종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저는 1호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에요. 제 앞에 1만명이 있었고 제 이후에 1만명이 또 있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하루 앞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청년정당 ‘우리미래’ 사무실에서 만난 오태양(43)씨는 ‘1호’라는 말을 거부했다. 종교적 이유로, 신념에 따라 총을 들 수 없다는 청년들이 2만여명이나 처벌받고 편견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언론이 주목하는 ‘1호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호칭은 낙인이자 벗어나고픈 굴레였다고 그는 말했다.

이날 <한겨레> 기자를 맞은 오씨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17년을 기다려온 결정을 앞둔 그의 속내까지 평화롭지는 않아 보였다. “2만명이 2년 정도만 감옥 생활을 했다고 하면 4만년이에요. 4만년을 기다렸으면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는 공개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2001년부터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험난한 길을 걷는 청년들이 낙엽처럼 쌓여야 길이 만들어질 것으로 믿었고, 기꺼이 그 낙엽 중 하나가 됐다. 이제 4만년이라는 시간이 낙엽처럼 쌓여 헌재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인생을 걸고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이 문제를 다룬 <한겨레21>의 기사였다. 2001년 2월 <한겨레21>에는 집총을 거부하고 감옥에 가길 선택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신도들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겠다는 사람을 기계적으로 전과자로 만드는 현실이, 그렇게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가는데도 어떤 문제의식도 없었던 한국의 사법정의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는 아니다. 하지만 양심의 명령에 솔직했던 그는 2001년 12월 입대 날, 훈련소 대신 병무청을 찾아 입영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언론은 그를 조명해 ‘1호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2만명의 청년을 감옥에 보낸 ‘병역법 88조 1항’에 대한 세번째 헌재의 판단이 나온다.

한국 사회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오태양 우리미래당 비대위원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한국 사회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던 오태양 우리미래당 비대위원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그는 병역거부 선언 뒤 스스로 삶의 궤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상징’이 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그 자체로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이었다. “병역거부를 한 뒤 스스로 대체복무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저소득층 아이를 상대로 한 공부방에서 활동하고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에 대한 기사가 포털사이트에라도 뜨면 그를 공격하는 댓글이 수천개씩 달렸다. 토론회와 강연장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거나 물병을 던지는 ‘안티팬’도 생겼다. “하루는 독거노인분께 밥을 퍼서 드리는데 식판을 내팽개치면서 ‘매국노가 떠준 밥은 먹을 수 없다’고 소리치시더군요.” 교대를 나온 그는 2004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선생님이 되겠다던 꿈도 접어야 했다. 더디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보낸 17년은 그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병역거부 선언은)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다”며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평생 불자로 살아온 그는 ‘불살생’이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산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다른 생각과 철학, 신념을 가진 이들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온 자신의 삶을 긍정했다.

가끔 접할 수 있었던 지지와 이해의 목소리는 17년의 기다림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그는 직업군인인 동창에게 받았던 전화를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그의 동창은 이라크 전쟁 파병 전날 전화를 걸어와 “나는 너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너의 선택은 지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씨의 마음도 같았다. “저도 파병에는 반대했거든요. 하지만 그 친구의 선택은 존중했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병역법 위반으로 예외 없이 넘겨진 형사재판 과정에서도 평화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형사재판이 진행되던 2004년 5월 이정렬 변호사(당시 판사)는 다른 병역거부자의 1심 재판에서 사상 처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징역 1년6개월이라는 ‘정찰제 판결’이 이어지던 당시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혁명적 변화였다. “그때 사법부에서 쿠데타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고 들었습니다. 헌재의 태도가 바뀐다면 그 변화의 시작에는 이정렬 변호사님이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헌재에 17년 전 자신처럼 용기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2년 전 병역거부를 하겠다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통화를 했던 내용을 전했다. “저는 그 어머니에게 ‘병역거부자로 살아보니 굉장히 어려웠다. 아들에게 ‘아직 젊으니 평생 이 길을 가도 좋을지 더 생각해보라’고 말해주는 게 좋겠다고 만류했습니다.” 오씨는 청년들이 더는 희생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이제 충분합니다. 그 청년에게 놓인 선택지가 ‘가혹한 군대’와 ‘더 가혹한 병역거부 이후의 삶’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환봉 기자, 이승준 <한겨레21> 기자 bon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