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이 아니라 위임계약을 맺은 채권추심원도 회사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고 근로의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면 ‘종속적 지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박아무개와 임아무개씨가 채권 추심회사인 ㅇ신용정보를 상대로 낸 퇴직금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이들을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볼 수 없다며 청구를 기각한 원심판결을 깨고 원고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판결은 “위임계약을 맺은 채권추심원도 회사로부터 구체적인 업무지휘를 받았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2016년 4월 대법원 판결 등에 이어, 계약의 형식보다 근로관계의 실제 내용에 따라 근로자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밝힌 것이다. 그동안 일부 채권추심회사들은 채권추심원과 근로계약이 아닌 위임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채권추심원들에 대한 퇴직금 지급을 피해왔다. 이번 판결은 업계의 이런 관행에 다시 한 번 제동을 건 것이다. 재판부는 박씨 등이 회사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고,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받은 보수도 근로의 대가인 임금 성격이 짙다는 점 등을 들어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종속적 근로관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회사가 채권추심원 등에게 적용한 ‘위임직 운용규정’은 집합연수 실시, 사무실 자리 배정, 사무실 출·퇴근 의무화, 징계해고·정리해고에 준하는 계약해지사유 규정, 정년 규정 등 사실상 취업규칙이나 인사규칙에 준하는 내용을 정하고 있고, 평가 기준도 있다. 회사는 이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업무처리 매뉴얼을 따르게 하고 목표 설정에서부터 업무처리에 이르기까지 업무를 구체적으로 지휘하고 관리·감독했다”며 “채권추심원 등은 회사로부터 수수료 차감, 계약 해지 등의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회사의 지시사항이나 주말근무 요구 등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박씨 등의 경우 최초 계약기간 3개월로 채용됐지만 반복적인 재계약이나 기간연장 합의로 각각 7년, 14년 동안 일하는 등 업무의 계속성이 있다”며 “받은 보수도 기본급이나 고정급 없이 성과급 형태로 지급됐지만 이는 업무 특성 때문일 뿐, 근로의 대가로서의 임금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런 점 등을 근거로 “계약 형식은 위임계약처럼 되어 있지만 그 실질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계약 관계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종속적 지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게는 퇴직금 등 임금 청구권이 인정된다.
대법원은 그동안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는 계약의 형식보다 실제로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면서, ‘종속적 관계’의 판단 기준으로 △사용자가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하는지 △사용자의 근무 시간과 장소 지정 등에 구속되는지 △근로 제공자가 비품·원자재를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할 수 있는지 △이익과 손실의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져 있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는지 △근로의 계속성과 사용자에 대한 전속성이 있는지 △사회보장제도에서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는 판례를 유지해왔다. 대법원은 특히 “이 중에서도 기본급이나 고정급 여부,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여부 등은 사용자가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이용해 뜻대로 정할 수 있으므로, 그런 점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일부 사건에서는 실제 업무형태 등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등 엇갈린 판결도 종종 내렸다. 대법원은 근로자성을 입증할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박씨와 임씨는 ㅇ신용정보에서 임대차 조사와 채권 추심 업무 등을 해오다 퇴직하면서 회사에 퇴직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회사가 근로계약이 아니라 위임계약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각각 2675만원과 4242만원의 퇴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2심은 “채권추심원들이 종속적인 지위에서 회사에 근로를 제공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1·2심에서 확인된 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계약관계로 봄이 상당하다”며 1·2심과 달리 판단했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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