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50년 7월 26일 한국전쟁 참전 미군들, 피난 중이던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은 발생 44년이 지난 1994년 소설로 출간되어서야 알려져
사건은 발생 44년이 지난 1994년 소설로 출간되어서야 알려져
“낮 12시께였어요. 전투기가 귀를 찢는 굉음을 내며 철길 위에 있는 피난민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창한 여름이었는데, 햇빛에 반사된 피와 살점이 얼마나 선명했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요.”
“폭격 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이 돼 있어요. 주변을 보니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고요. 할머니도,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생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은 ‘소설’ 책으로 포장되고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68년 전 오늘,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서 일어난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이야기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경부선 철로 위에서 피난 중이던 주민들을 총으로 쏘아 사살했다. 공중폭격과 지상군 사격을 동반한 무차별 학살은 3박 4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확인된 희생자만 모두 226명(사망 150명, 실종 13명, 부상 63명)에 달했다. 게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이었다. 사망자 가운데 27%는 영·유아 및 10살 이하의 어린이들이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일보>가 1950년 8월19일치에 처음 보도한 이후 44년 동안 언론 매체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노근리 사건이 수십 년간 묻힐 수 있었던 데는 사건 가해자들의 조직적인 은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남을 것 같았던 노근리 사건은 1994년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실록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가 출간된 이후 국·내외적으로 큰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뒤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이면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여러 물리적, 기술적 어려움이 존재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한국전쟁 동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일부 신문들은 정치적으로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았다. 종군 기자들도 당시 미군의 ‘완전 검열’이라는 엄격한 보도통제에 시달려 전쟁 보도를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건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첫 시작은 사건이 발생한지 10년이 지난 1960년이었다. 노근리 사건으로 아들과 딸을 한꺼번에 잃은 정은용씨는 주한 미군 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또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절 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은인인 미군의 범죄는 감히 꺼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권이 바뀌자 군 진급 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은 사건을 철저히 은폐했고, 언론은 노근리 사건을 뉴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사건은 ‘금지된 이야기’가 되어 역사의 어둠 속으로 묻히는 듯했다.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지만 비극을 덮어두기에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너무도 컸다. 1994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한 정은용씨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담아 노근리 사건을 고발하는 실록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외부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다.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내·외신 언론사를 대상으로 노근리 사건을 알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 결과 <한겨레> 1994년 5월4일치에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가 실렸다. 책이 출간된 직후 최초의 언론 보도였다. 당시 기사는 정씨와 마을 주민들의 인터뷰를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7월20일 치에서는 집집마다 ‘떼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후속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노근리 주민들은 미국 정부와 당시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등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전 세계 특종이 된 노근리 사건
세계 곳곳의 신문 머리기사를 통해 노근리 사건이 폭로된 건 소설이 출간된 지 4년, 사건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흐른 뒤였다.
1999년 9월29일, 미국 <에이피(AP)통신>은 ‘전직 병사들이 한국의 학살에 대해 말하다’라는 제목의 특별취재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1950년 7월 말, 한국의 한 철도 굴다리와 그 주변에서 4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50년 7월26일부터 7월29일까지 사흘 동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난 주민 학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입증하는 문건도 여러 건 공개됐다.
에이피(AP)통신은 비밀 해제된 군사 문건을 인용해 미군 지휘관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군의 침투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선으로 접근하는 피난민을 사살해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1기갑 사단과 보병 25사단이 이 지역 주둔군에 내린 명령문에 따라 학살이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문건도 공개했다. 한국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10여 명이 “노근리 주민들에 대해 미군이 기총소사를 자행했다”고 증언하는 130여 회의 인터뷰도 덧붙였다.
수십 년 동안 피해자들의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 언론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에이피(AP)통신의 보도로 노근리 사건이 세계적 이슈가 되고, 한국에서도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한·미 합동 조사
1999년 10월 초, 당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큰 틀에서 일치되고 있는 만큼 한·미 합동 조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9년 10월28일에는 미국 정부의 노근리 사건 실무조사단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사건이 자행된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의 남은 총탄 자국 등을 둘러봤다. 조사단은 이어 피해자와 유족 6명으로부터 50여 분 동안 비공개로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미 조사단 전체회의를 열어 노근리 사건의 진상조사 작업을 이듬해인 2000년 상반기까지 마무리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쪽 실무조사단의 방문과는 별개로 당시 주민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증언한 미군도 50여 년 만에 사건 현장을 찾았다. 에드워드 데일리는 사건 현장인 쌍굴다리 주위와 경부선 철로 위를 둘러보고 굴다리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도 살펴봤다. 데일리는 이날 “어린이와 노약자를 쏘라는 명령을 차마 따를 수 없어 굴다리 벽 쪽으로 총을 쐈다”며 “평생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데일리는 피해자와 유족 등을 만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데일리는 이 자리에서 “1950년 7월26일 미군 전투기가 철길 위에 있던 400~500명의 피난민을 폭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어린이와 여자, 노인이 있는데 명령이 확실하냐”고 반문했으나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덧붙였다.
미군의 ‘발뺌’과 미국 대통령의 ‘유감 표명’
미국으로 돌아간 실무조사단은 돌연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소재를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 결국 2001년 1월이 되어서야 미 국방부가 내놓은 최종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민간인들에게 일어난 일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비극의 일례로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만 규정했다.
2001년 1월12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감을 표명했지만 ‘사격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식으로 명령 체계에 따른 학살이란 사실은 공식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줄 수 없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공식 조사 발표 이후에도 미 참전 군인들의 ‘상부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이 계속되자 미 국방부는 ‘명령이 없었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이 있었다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증언에 나섰던 참전 미군들은 증언 내용을 번복했다.
미국 정부는 2006년 9월 말,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 성명서 발표 때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추모탑 건립 및 추모 장학금 기금예산을 미국 정부의 국고로 회수해 가 버렸다.
이런 와중에 2004년 2월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은 물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국가가 배상할 필요 없다”며 1심과 2심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익명을 요구한 노근리 사건 피해자는 2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 대부분은 당시 부모와 형제를 잃어 제대로 배우지도, 먹고 입지도 못한 곡절의 삶을 살아야 했다”며 “이들은 아직까지 정부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아울러 “노근리 사건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추모공원의 예산 지원 규모도 제주 4·3 평화공원과 5·18 민주화공원 등 다른 지역의 추모시설과 견주어 10분의 1 수준으로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노근리 사건 희생자들을 차별 없이 추모하고, 그들의 인권과 평화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밝혔다.
2년 뒤인 2020년이면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 70주년이 된다. 노근리의 비극은 언제쯤이면 끝날 수 있을까.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 작은연못배급위원회 제공.
1950년 미군 정찰대가 찍은 노근리 일대. 사각형으로 표시된 부분은 미군이 폭격을 가한 철로 인근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노근리 평화재단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조선인민보, 노근리 학살 기사. <한겨레> 자료 사진.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민간인학살 내용은 담은 미군 비밀문서. <한겨레> 자료 사진.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비행기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피난 가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경부선 철도 쌍굴다리. 영동/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 1999년 9월 30일 치.
<한겨레> 1999년 9월 30일 치.
<한겨레> 1999년 9월 30일 치.
<한겨레> 1999년 10월 30일 치.
<한겨레> 1999년 11월 4일 치(왼쪽), 1999년 11월 5일 치.
미군이 제작한 미 군사용 지도와 Overlay를 합성한 작전 지도. '#' 로 표시된 부분이 노근리다. <한겨레> 자료 사진.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미군 방어선에 다가서는 피난민한테 총을 쏠 수 있는 방침을 세워놓았음을 보여주는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서한. 이 서한이 작성된 1950년 7월25일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도 쌍굴다리 아래서 피난민 수백명이 미군 총격에 무참히 쓰러진 노근리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쌍굴에서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모행사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임시분향소에 분향하고 있다. 뒤쪽 철길 벽에 흰색으로 표시해 놓은 것이 총탄 흔적이다. 영동/이종근기자 root2@hani.co.kr
참고문헌
<미국사 산책 7:뜨거운 전쟁과 차가운 전쟁 > 강준만
<노근리 그 후 > 오연호
<노근리 다리 > 최상훈 ·찰스 핸리 ·마사 멘도자
<노근리 사건의 진상과 그 성격 > 이만열 ·김윤정
<노근리 사건의 역사적 및 국제법적 성격과 향후과제 > 이재곤 ·정구도
<노근리 사건 한 ·미 공동 발표문 >
<노근리 사건 한국정부 조사보고서에 대한 반론서 > 정은용
연재역사 속 오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