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현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24일 오전 검찰 소환 조사에 응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고참 고령자의 장기간 재직으로 인한 조직의 노쇠화를 막고, 버티면 정년까지 간다는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0년께부터 작성·실행해 온 ‘바람직한 조직문화를 위한 퇴직자 관리 방안’ 문건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29일 <한겨레>가 확보한 이 문건을 보면, 공정위는 이 문건 안에 ‘재취업 리스트’를 작성하고 기업들에게 정년을 2년 앞둔 58세의 퇴직 예정 간부들(4급 이상)의 ‘특혜 재취업’을 압박해 왔다.
운영지원과에서 작성해 사무처장·부위원장·위원장에게 각각 보고된 이 문건에서 공정위는 기업 압박의 목적이 ‘불필요한 인력을 기업으로 빼내 내부 인사적체 해결’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간 공정위 쪽이 언론 등에 “기업들이 원해서 퇴직자들을 소개한 것뿐”이라고 해명해온 내용과도 배치된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재계 저승사자’를 자임해 온 공정위가 기업들을 내부 조직 다루듯 한 인식이 드러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기업들은 공정위 퇴직자 채용 과정에서 “불필요한 인력 채용은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등 내부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입사한 공정위 퇴직자들은 별다른 업무도 맡지 않고, 제대로 출·퇴근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공정위의 퇴직자 ‘추천’ 방식도 여러 후보자를 추천해 기업이 이 가운데 필요한 인물을 고르는 방식이 아니었다. 퇴직에 가까운 ‘연령순’대로 단독 후보자를 자신들이 요구한 직위에 심는 등 민간기업을 사실상 산하 기관이나 내부 조직 다루듯 했다는 게 검찰이 파악한 내용이다. 또 새롭게 ‘재취업 기업’을 뚫은 운영지원과장은 위원장 등 공정위 수뇌부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 해당 문건에는 ‘국장급(2급) 퇴직자’→‘고문’, ‘과장급(3∼4급) 퇴직자’→‘임원’, ‘무보직 서기관(4급)’→‘부장’이라는, 이후 그대로 실행된 도표 형태의 계획도 등장한다. ‘고시(5급) 출신→2억5천만원, 비고시(7·9급) 출신→1억5천만원’ 식으로 퇴직자의 연봉뿐 아니라 채용 직급까지도 공정위가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기업의 채용업무 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정재찬 전 공정위 위원장과 김학현 전 부위원장, 신영선 전 부위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은 3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다. 김 전 부위원장은 “해당 문건 지시 및 작성, 실행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심문을 포기했다.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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