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한겨레> 자료사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간부가 청와대를 찾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논의하면서 주유엔 대표부 법관 파견을 청탁한 데 이어, 청와대가 법원의 이런 청탁을 외교부에 전달한 정황도 확인됐다. 대법원이 원했던 것처럼 실제 주유엔 법관 파견은 성사됐다.
5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2013년 10월29일 임종헌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청와대를 방문해 주철기 당시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주유엔 대표부 법관 파견을 청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임 전 실장은 그해 9월 대법원에 재상고된 ‘강제징용’ 소송 경과와 향후 진행 방향 등을 함께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수석은 또 면담 직후 이런 면담 내용을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고스란히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듬해 2월부터 법관의 주유엔 대표부 파견이 재개됐다.
‘강제징용’ 사건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진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2012년 5월 대법원이 신일철주금·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놓고도, 정상적인 파기환송심 절차를 밟아 올라온 같은 사건에 대해 5년간 결론을 미루다가 지난달 갑작스럽게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다.
검찰은 양승태 대법원이 해당 소송을 연기하거나 파기하는 대가로 청와대로부터 국외에 파견할 법관 자리를 얻어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또 청와대를 대리한 외교부가 행정처와 함께 ‘강제징용 사건 민원’과 ‘법관 파견 청탁’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신봉수)·3부(부장 양석조)가 지난 2일 외교부 압수수색에 나서면서, ‘대법원-외교부-청와대’ 삼각 커넥션도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2012~13년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는 “김기춘 비서실장, 이정현 홍보수석 등 청와대 인사위원회 (멤버와)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등의 대목이 나오고, 2014년 12월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한 문건에는 “BH(청와대) 협조요청사항. 재외공관 법관 파견에 적극 협조. 외교부의 긍정적·전향적 태도 유도” 등의 내용도 등장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중단됐던 법관 국외 파견 제도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13년부터 재개됐다. 현재 주유엔 대표부, 주제네바 대표부, 네덜란드 대사관 등에 법관이 파견되고 있다.
검찰이 ‘재판 거래’ 과정에서 청와대의 개입 여부에 대한 수사에 고삐를 죄고 있는 가운데,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과 집행을 총지휘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560여일간의 수감생활 끝에 5일 자정 석방됐다. 대법원은 지난달 27일 ‘블랙리스트’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면서 구속취소를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1심이 진행 중인 ‘세월호 보고조작 사건’과 ‘보수단체 불법지원’ 사건 재판부에 구속이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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