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이 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므로 처벌에서 제외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대법원에 제출했다. 대체복무제도로는 현역 복무 기간의 약 1.5배 기간 동안 합숙 형태를 권고했다.
인권위는 8일 “양심적 병역거부자, 양심적 예비군훈련 거부자에게 대체복무의 기회를 주지 않고 병역법 제88조 제1항, 예비군법 제15조 제9항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양심적 병역거부는 각 규정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므로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지난 31일 대법원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인권위의 이번 결정은 오는 30일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공개변론을 앞두고 대법원이 인권위에 의견을 요청하면서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3인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거나 기존 판례를 바꿀 필요가 있을 때 이뤄진다. 앞서 대법원은 소부에서 심리하던 예비군법 위반 사건과 병역법 위반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기로 결정하면서 공개변론도 함께 열기로 했다. 이에 대법원은 인권위를 비롯한 국방부, 병무청 등 관련 기관에 양심적 병역거부 및 대체복무제 도입에 대한 의견을 요청한 바 있다.
인권위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법원 판결과 사회적 인식이 변했다”는 점을 근거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선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2016년 10월 최초의 항소심 무죄 판결이 선고된 후 1심 무죄 판결 선고가 급증했고, 지난해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72건의 1심 무죄 판결이 선고됐다”며 “20대 국회에는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세 건 발의되는 등 처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대체복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06년 한국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제기한 개인통보사건을 인용,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은 자유권규약 제18조 위반이라며 한국 정부에 이들의 석방과 구제조치를 요구했다”는 등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이 국제기준에도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벌의 정당성 여부와 대체복무제에 대한 논의는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속도를 내왔다. 헌재는 지난 6월28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병역법 제88조 제1항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봤으나, 병역 종류를 ‘현역·예비역·보충역·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으로만 한정한 같은 법 제5조 제1항에 대해서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은 합헌이지만, 대체복무제도 없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해 헌법불합치라고 본 것이다. 헌재는 해당 규정에 대해 2019년 12월31일까지 대체복무제를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헌재 결정 이후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체복무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속도를 내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참여연대 등은 지난달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제 시민사회안’을 공개했다. 이들은 치매 노인 돌봄, 장애인 활동지원 등의 영역에서 현역 육군 복무 기간의 1.5배 이내로 일하는 방안을 대체복무안으로 제안했다. 이들 단체는 “업무 난이도와 강도를 고려했을 때 입영 기피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낮은 부문을 골랐다”며 “현역 육군 복무 기간의 최대 1.5배로 기간을 한정한 것은 대체복무제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징벌적 성격을 띠어선 안 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인권위도 이날 결정문에서 “환자수송, 소방업무 등 희생정신을 필요로하는 영역에서 현역복무 기간의 약 1.5배에 해당하는 기간 합숙 형태로 제도를 도입한 뒤 개선해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현재 대체복무제도 마련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추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와 국회에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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