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고 김정로 선생의 아들 김성식(82)씨가 김구 선생이 아버지에게 친필로 써서 줬던 부채를 들어 보이고 있다. 부채에 적힌 ‘조국혼심경세종(祖國魂心驚世鍾)’은 ‘조국의 혼을 마음에 담고 세상을 놀라게 하라’는 뜻이다.
“7살 때 전주 형무소에 있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났어요. 그때야 아버지가 독립투사라는 걸 알았습니다.”
김성식(82)씨는 75년 전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고 김정로(1914∼1958) 선생이다. 어린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그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물어도 “아버지는 좋은 일 하러 가셨고, 곧 돌아오신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러 가자”며 데려간 곳이 전주 형무소였다. “어머니와 면회장에 앉아 있으니까 파란 수의에 복면을 쓴 사람이 나왔어요. 면회를 해야 하니 교도관이 복면을 벗겼는데, 그게 처음 본 아버지 얼굴이었어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머지않아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고 김정로 선생은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투사다. 광주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학생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수배되자 그는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떠났고, 그곳에서 김구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됐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김정로 선생은 1935년 전북 전주시에 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할 ‘건지사’라는 절을 짓고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3년 동료의 밀고로 독립운동가 42명과 함께 체포돼 전주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으로 풀려난 뒤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조국 재건에 힘쓰다 ‘김정두’란 이름으로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독립운동가였던 손일민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원래 아버지 성함은 김정규인데 김구 선생은 ‘김정로’란 이름을, 손일민 선생은 ‘김정두’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광복 후 김구 선생께서 절 보고 ‘네가 정규 아들이냐’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했지요.”
김정로 선생은 1958년 44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추측한다. 요절한 아버지의 뜻은 아들인 김씨가 이어받았다. 김정로 선생은 생전에 아들 김씨에게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돼라”고 가르쳤다.
김씨는 수십 년째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40년째 서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김씨는 2009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독거 어르신들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 1983년부터 1996년까지 약 13년 동안 식당 인근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교통지도를 해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 밖에도 김씨는 무궁화 나무 등을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등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국회의원까지 하신 아버지였지만 10원도 물려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정신만큼은 이어받아서 작은 봉사활동도 애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김씨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내년에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할 계획이다. 김정로 선생이 생전 “내 이름을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업적을 알리는 것도 나라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독립을 위해 힘썼던 아버지의 활약을 알리고,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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