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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랑 좇아 온 나라에서 단지 일본인이라 죄인이었지”

등록 2018-08-19 09:36수정 2018-08-19 10:08

[토요판 기획] ‘잊힌 이름’ 재한일본인 처
①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② 나를 미워하는 땅에서
▶ 광복 73돌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한일본인처. 한국전쟁과 가난, 가해 국가 출신이라는 정체성은 그들의 한국살이를 고단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한·일 두나라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한국의 피해자 민족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 사관 모두 그들의 삶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기록해온 전쟁과 식민지배의 시대를 이들 ‘소수자 여성 집단’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재한일본인 처 야기 치요(생존 땐 92살)는 정체불명의 남성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총을 들고 집에 들이닥쳤다. 지난 세월이 옹이처럼 박힌 손이 그가 겪어온 고된 삶을 말하는 듯하다. 김종욱 제공
재한일본인 처 야기 치요(생존 땐 92살)는 정체불명의 남성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총을 들고 집에 들이닥쳤다. 지난 세월이 옹이처럼 박힌 손이 그가 겪어온 고된 삶을 말하는 듯하다. 김종욱 제공

부~웅 부~웅.

뱃고동이 울었다.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가는 배의 출항을 알리는 소리였다. 사토 데루코(93)는 가방에서 분첩을 꺼내 콧등을 서너 차례 눌렀다. 난생처음 시댁에 가는 길이었다. 시부모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아껴 둔 양장도 꺼내 입었다.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손에는 작은 양산을 들었다. 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사토의 옆엔 평생 반려자가 될 조선인 남자가 있었다.

“그때 나는 조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좋아하는 남자 따라온 거야. 시집가는 길이잖아. 옷이고 신발이고 다 예쁘게 잘 차려입었지. 얼굴에 화장도 하고, 옷 많이 가져가려고 큰 가방도 들고.”

사토는 배 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고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선 광복 직후의 어느 날이었다.

“남편만 믿고 바다를 건넜는데”

1925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사토는 재주가 많았다. 스무살이던 1945년 그는 연극의 재미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설날이나 추석 땐 꼭 연극 무대에 올랐다.

“내 친한 친구가 그때 조선에서 온 남자하고 사귀었거든. 그 친구가 나한테도 조선 남자를 소개해준 거야. 그때 처음 만났어, 남편이랑.”

사토의 남편은 일본에 일하러 온 노동자였다. 그는 종종 동료들과 사토의 공연을 보러 왔다. 사토는 남편에 대해 “외모가 굉장히 예뻤다”고 했다.

당시 사토는 고모에게 결혼 압박을 받고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사토는 고모의 손에서 자랐다. 사토의 고모는 자신의 양아들과 조카인 사토를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사토는 그 남자가 싫었다.

“나는 그 애가 도둑놈 같아 보이고 싫었어. 고모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커서 경찰서도 몇 번 갔다 오고 그랬단 말이야.”

친구가 소개해준 조선인 남자는 성품이 온화했다. 고모의 양아들과 달라서 더 좋았다. 조선 광복 이후 고향에 돌아가는 그를 따라 덜컥 배를 탔다.

“고모 몰래 도망쳤어. 일본에 있다간 고모 양아들과 진짜 결혼하게 될까봐 겁이 막 나더라고.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조선으로 가는 연락선을 탔지. 남편이랑은 결혼식도 못했어. 그때 남자 따라서 조선에 넘어온 일본 여자들 중엔 나처럼 결혼식 못 올린 사람들이 참 많았어.”

사토의 시집은 강원도 산골에 있었다. 항구에 내려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가파른 산길도 걸었다. 구두 신은 발이 아팠지만 사토는 내색하지 않았다.

“시댁에 도착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는 거야. 손을 막 만지고, 구두도 만져보고, 들고 온 양산도 가져가서 펴보고. 말도 안 통하는데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니까 이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나, 마음이 막 불안하고 그랬지.”

재한일본인 처들 중엔 남편의 외도와 가정불화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 남편에게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도 있었고, 일본인 며느리를 들이지 않겠다는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신고를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향에 돌아온 사토의 남편은 매일같이 놀고먹었다. 노름판도 드나들었다. 사토는 그런 남편이 야속해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때 진짜 죽을 생각이었어. 누가 독한 술 많이 마시면 죽는다고 해서 고량주를 동이째로 마셨거든. 깨보니까 동네 의사가 온몸에 주사를 놔서 살렸다더라고.”

사토의 남편은 죽다 살아난 아내를 보고도 노름을 끊지 못했다. 노름빚은 천정부지로 늘었고, 남편은 빚에 몰려 야반도주했다. 사토가 임신 다섯달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 남편 하나 믿고 조선에 왔는데,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리고 도망갔잖아.”

당시 사토는 조선말을 전혀 몰랐다. 유일하게 일본어를 했던 남편이 떠나버리자 시집은 사토에게 외딴 무인도와도 같았다.

“임신하고 얼마나 먹고 싶은 게 많았겠어. 누구한테 말을 할 수가 있나, 내게 돈이 있길 하나.”

먹질 못하니 사토의 몸은 나무 막대기처럼 말라갔다. 임신 일곱달이 되도록 배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사토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엉엉 울었다. 시어머니가 호미를 들고 방에 들어섰을 땐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아이고, 그때 말이 안 통하니까 얼마나 놀랐겠어. 일본인 며느리가 애도 잘 못 낳는다고 죽이려는 줄 알았다니까.”

시어머니는 문틀에 호미를 끼운 뒤 사토가 손을 뻗어 잡도록 했다. 호미라도 붙들고 힘을 쓰라는 뜻이었다. 사토는 그렇게 첫아들을 낳았다. 아이를 낳은 뒤에도 남편은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야 친척집에 얹혀살다 군에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 없는 집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사토는 시집을 떠났다. 겨울이었다. 돌도 안 된 아들을 데려갈 수 없어 울면서 눈길을 걸었다. 이후 경주에 정착해 산나물을 뜯고 물레질을 하며 살았다. 십여년 뒤 시집을 찾아가니 시부모는 죽고 아들의 행방은 묘연했다. 사토는 평생을 자식 버린 죄인으로 살았다.

사토 데루코(93)의 남편은 노름빚에 몰리자 자기만 믿고 일본에서 따라온 아내를 남겨둔 채 야반도주했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사토는 이후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김종욱 제공
사토 데루코(93)의 남편은 노름빚에 몰리자 자기만 믿고 일본에서 따라온 아내를 남겨둔 채 야반도주했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은 사토는 이후 다시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김종욱 제공

“쪽발이” “왜년” 멸시당하며

사토가 남편과 결혼한 1940년 전후 일본에는 조선인 남성이 많이 살았다. 중일전쟁(1937년) 이듬해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을 강제징용했다. 전쟁에 동원된 일본 청년을 대신할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일본 내무성 통계를 보면 1938년에 79만명이던 재일조선인이 1944년엔 194만명(강제징용 포함)에 이르렀다. 조선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은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 정책’의 일환으로 ‘내선결혼’을 장려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친일단체)은 1940년 한 해 동안 내선결혼한 당사자들에게 미나미 지로 총독의 친필이 담긴 족자와 표창장을 수여했다. 친일 출판사인 내선일체실천사는 내선결혼 상담부를 운영하며 직접 중매까지 섰다.

16살에 조선 땅을 밟은 후쿠다 마사코(1930~2012). 그는 주변에서 삶을 비관해 자살한 일본인 처를 여럿 목격했다.

“나랑 가까운 데서 살던 일본 여자가 있었어.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너무 예쁘고 그랬는데, 남편 따라 조선에 왔더니 본처가 있는 거야. 다 큰 자식도 있고. 기가 막히지. 그 큰 바다 다 건너서 여기까지 왔는데.”

후쿠다는 자신을 보며 웃던 앳된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 여자는 스물도 안 된 나이에 벌써 ‘첩’ 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선말을 몰라 시어머니와 본처에게 구박받았다.

“살 수가 없지. 나 같아도 못 살았을 거야. 결국 자살했어. 그렇게 살다 죽은 일본 여자들 많이 봤어. 목매달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광복 이후 반일감정이 컸던 조선에서 재한일본인 처들은 가해자인 일본 국민이라는 이유로 ‘죄인’의 삶을 살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발간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9집>에는 1947년 국적법 제정 논의 당시 일부 국회의원들이 일본인 처를 둔 자에게 국적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기록이 나온다. 일본인 처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지속적인 멸시와 차별에 괴로워했다.

“조선에 와서 보니까 동네에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있었거든. 동네 사람들이 나무에다가 일본 나무라고 이름표를 달아놓고 저녁마다 하나씩 베어버리는 거야.”

커다란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후쿠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끼질 소리가 쿵쿵 울릴 때마다 놀란 몸이 움찔거렸다.

“그때는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했어. 나중에야 알았지. 일본에 당한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알고 나서야 당연한 일이었겠구나 했어.”

동네 사람들은 후쿠다를 ‘쪽발이’ ‘왜년’이라고 불렀다. 그는 매일같이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남편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맞았다. 일본에서 주고받은 숱한 사랑의 말이 무색했다. 남편은 너무도 쉽게 변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지. 조선으로 넘어오는 배 타던 날에, 그때 내가 한 번만 더 뒤돌아봤으면. 그 배만 안 올라탔으면.”

남편 믿고 낯선 땅으로 따라왔으나
집에는 이미 결혼한 아내가 있거나
시부모 반대로 혼인신고 못하기도
노름·폭행한 남편 떠나버린 집에서

홀로 남아 외로운 ‘한국살이’ 견뎌
삶 비관 자살한 재한일본인 처 많아
가해국가 국민이란 이유로 멸시
조선인-일본인 결혼 반대하는 무리
총을 들고 집에 들이닥치는 상황도
의지할 것 없는 땅에서 마치는 삶들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한 야기 치요(2017년 이후 생존 여부 확인 안 됨·생존 땐 92살)는 정체불명의 남성들에게 끌려갈 뻔했던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다. 야기가 시부모와 함께 밭일을 하느라 집을 비운 날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한 무리의 남성(야기의 기억에 따르면 경찰로 추정되나 확실치 않음)이 총을 들고 야기의 집에 들이닥쳤다. 집에 있던 남편이 그들과 맞닥뜨렸다.

“남편이 하는 말이 조선인이랑 결혼한 일본인들을 잡아가려고 하더래. 근데 남편이 거짓말을 한 거지. 나를 이미 일본에 돌려보냈다고. 그래서 겨우 살았어.”

그날 야기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들은 야기의 사진첩, 옷가지, 이불 등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남편과의 결혼 서류도 그때 사라졌다.

“밤마다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기름 넣어서 쓰는 작은 호롱불 있지. 그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울면서 보는데 기분이 참 안 좋더라고.”

야기는 휘청거리는 호롱불이 꼭 제 모습 같았다. 남편이 외도를 하면서부터는 더 그랬다.

후쿠다 마사코(1930~2012)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쪽발이’ ‘왜년’이란 말을 들으며 살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지. 조선으로 넘어오는 배 타던 날에 내가 한 번만 더 뒤돌아봤으면. 그 배만 안 올라탔으면.” 김종욱 제공
후쿠다 마사코(1930~2012)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쪽발이’ ‘왜년’이란 말을 들으며 살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했지. 조선으로 넘어오는 배 타던 날에 내가 한 번만 더 뒤돌아봤으면. 그 배만 안 올라탔으면.” 김종욱 제공

남편 떠난 뒤 홀로 남은 세월

지난 4월 벚꽃이 비처럼 떨어지던 날, 서울에서 아오키 츠네(90·1화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가 나자레원(경주에 있는 재한일본인 처 복지시설)으로 찾아왔다. 다리가 불편한 가츠라 시즈에(97)가 휠체어를 타고 친구를 맞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가츠라)

“난 괜찮아요. 언니는?”(아오키)

5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를 걱정하며 깊이 끌어안았다.

가츠라는 1920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스무살 무렵인 1940년대 초에 남편을 만났다. 가츠라가 외삼촌과 함께 작은 전기회사를 다닐 때였다. 남편도 같은 회사에 다녔다. 그는 조선에서 온 전기기술자였다. 가츠라에게 남편을 소개한 것도 외삼촌이었다. 가츠라는 남편을 떠올리며 “참 착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가츠라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조선인과 결혼하겠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거세게 반대했다. 형제들도 탐탁지 않아 했다. 외삼촌만 가츠라를 응원해 줬다.

“삼촌이 부모님한테 남편에 대해 얘기해 줬어. 자기가 데리고 있는 직원인데 사람이 좋고 일도 잘한다고. 조선인은 태어난 나라만 다르지 일본인이랑 얼굴 생김새도 다 똑같지 않냐면서 결혼시켜도 괜찮다고 했지.”

이 일로 어머니는 남동생(가츠라의 외삼촌)과 한동안 말도 하지 않았다. 가츠라는 결혼을 강행했다. 축복받는 결혼은 아니었지만 간단한 식은 올렸다. 화가 난 부모님은 가츠라와 석달 동안 연락을 끊었다. 가츠라는 조선 광복 열흘 뒤인 1945년 8월25일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이주했다.

“남편 따라서 조선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러는 거야. ‘이제 조선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 있다고 하지 말라’고.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하라고. ‘부모 반대 마다하고 가는 거니까 부모도 없다고 하라’고.”

가츠라는 남편 고향인 전북 임실에서 살았다. 난생처음 농사도 지었다. 딸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어려서 병들어 죽었다. 가츠라가 자식을 더 낳지 못하자 주변에선 남편에게 후처를 권했다.

“나도 남편한테 여자를 새로 얻으라고 했어. 그런데 남편이 그러더라고. ‘일본에서 잘 살다가 나 하나 믿고 따라왔는데 고생시킬 수 없다’고. 후처 안 얻는다고.”

그 남편이 마흔여덟에 죽었다. 그때부터 가츠라는 임실에서 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1970년대 말 아오키 츠네를 부용회(재한일본인 처 모임)에서 만났다. 외로운 그에게 친구는 같은 처지의 재한일본인 처들뿐이었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강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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