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98) 할아버지가 지난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양승태 대법 재판거래 규탄 및 일제 강제동원 피해 소송 전원합의체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회견문을 제출하기 위해 청사로 향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양승태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전범기업 상대 소송 심리불속행 만기(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접수일로부터 4개월)를 20일도 안남기고 관련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법원 안팎에서는 “대법원 스스로 ‘심리 지연’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이 절차 지연 이유로 꼽은 ‘번역작업 3개월’ 역시 재판 지연 이유로 보기엔 몹시 궁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은 지난 20일 “강제징용 사건 심리불속행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지연이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론에서 ‘대법원이 2012년 5월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놓고 별다른 사정변경이 없는데도 박근혜 청와대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심리불속행 결정을 포기한 게 아니냐’고 비판하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기도 하다.
대법원은 처음에 “심리불속행 여부 판단은 상고인인 일본기업이 법원으로부터 소송기록 접수통지서(통지서)를 송달받고 상고이유서까지 낸뒤 이뤄지는데, 국외송달이 늦어지면서 심리불속행 기간이 끝난 2014년 5월에야 통지서가 송달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 심리불속행 만기(2013년 12월9일)를 20일도 안 남긴 2013년 11월22일에야 통지서를 보냈다는 비판이 나오자, 대법원은 “통지서 일본어 번역 과정이 오래 걸렸다”고 추가로 해명했다.
대법원 상고기록접수통지서. 대법원은 “해당 양식은 2014년 5월 도입됐다”면서도 “징용 재상고심 당시에도 같은 내용의 서류가 사용된 것은 맞다”고 했다. 대법원 제공
■2장짜리 ‘통상’ 서류 번역에 3달 걸렸다는데 하지만 법원 안팎에서는 “통지서 번역에 3개월이나 걸렸다는 해명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실제 24일 대법원이 공개한 ‘상고소송기록 접수통지서’를 살펴 보니, 2장짜리 A4용지에 사건이름, 원고·피고 등 소송당사자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대개 상고장 등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함께 기재된 유의사항에는 “통지서를 받은 날부터 20일 안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해야 한다”, “제출 자료에는 대법원 사건번호를 기재하라”, “대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상고이유서는 한국어로 번역한 문서를 첨부해 제출하라”는 설명과 함께 대법원 연락처 등이 담겨 있다. 소송절차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징용 재상고심 접수서를 통지할 당시에는 일본어 통지서 양식이 마련돼 있지 않았고, 매번 따로 번역했다. 해당 양식은 2014년 5월에야 도입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양식 도입 이전에 만들어진 통지서에도 (해당 양식과) 비슷한 내용을 기재해온 것은 맞다”고 했다.
대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앞서 국외송달 사건에 이용했던 양식을 충분히 ‘재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해당 건은 상고기록 접수를 ‘통지’하는 간단한 절차에 불과하므로, 송달까지 1달이면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다시 “재상고심에서 번역 지연이 송달 지연에 미친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통상적으로 국제소송의 경우에는 송달이 오래 걸린다”고 해명했다.
■서류 적은데…“비교적 빨리 진행했다”? “앞선 재판보다는 절차를 빨리 진행했다”는 대법원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은 징용사건 소송기록 통지 절차가 6개월(1심·2005년), 9개월(2심·2008~09년), 7개월(3심·2009~10년)씩 걸린 점에 비춰, 재상고심에서는 통지 절차를 비교적 신속히(3개월13일) 진행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대법원이 비교 대상으로 삼은 재판들은 징용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을 내거나, 패소판결에 반발해 항소·상고한 경우다. 이런 경우 원칙적으로 소·항소·상고의 상대방인 전범기업에 통지서뿐 아니라, 소장 부본(1심), 항소장 부본(2심), 상고장·상고이유서 부본(3심) 등이 추가로 전달돼야 한다. 전범기업이 재상고한 경우 통지서만 전달되는 것과 달리, 번역해 통지할 서류의 종류가 많고 내용도 복잡한 셈이다.
게다가 해당 사건들은 심리불속행 규정이 적용되지 않거나(1·2심), 적용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경우(3심)였다. 4개월이라는 ‘빠듯한’ 심리불속행 기간에 쫓기는 재상고심 사건을, 앞선 사건과 단순 비교해 “문제없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개별 사건 관련 정보가 담겨 있어 상대적으로 번역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소장·항소장·상고장과 달리, 재상고심에서는 통상의 소송과 비슷한 양식의 절차 관련 서류만 보내면 충분했다. 번역에 오랜 시간이 걸려서 통지 절차가 늦어졌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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